“냉장고가 텅 비었네”
어제 저녁 남편이 마치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슬쩍 한마디한다.
“음, 그래도 며칠은 버틸 수 있어”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넘긴다.
의연한 태도로 마지막 남은 재료들을 총동원해 저녁 식탁을 차렸다. 멸치 국물로 미역국을 끓이고, 한 개 남은 감자로 감자조림을 했으며, 어묵을 살짝 맵게 볶아 내고, 그리고 밑반찬 두 가지에 김치와 김을 내니 내가 봐도 괜찮은 식탁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고기만 없을 뿐.
“역시 당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이야. 어떻게 그렇게 텅 빈 냉장고에서 이런 식탁을 차릴 수 있어”
남편은 아부 끼가 역력한 말투로 칭찬하면서도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내일 끼니가 또 걱정되는 것이다. 그러더니 결국 오늘은 좀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다시 한마디한다.
“여보, 이젠 마켓 좀 봐야 되는 거 아냐? 먹을게 정말 없네”
마켓 보기가 싫은 이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한번 대대적으로 장보고 온 다음에는 몇 시간 동안 부엌에서 뒷손질을 해야 하니 가기 전부터 징그러워지는 것이다.
보통 2주에 한번씩 한인타운에서 장을 열두 봉지씩 보고 온 날의 노동은 다음과 같다.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봉지마다 내용물을 다 꺼내 놓고 냉동 칸에 넣어야 할 것들부터 칸칸이 집어넣는다. 냉장고 안을 재빨리 정리하면서 계란, 두부, 어묵, 떡, 김치, 온갖 야채와 과일 등등을 해당되는 칸으로 꺼내 쓰기 좋게 차곡차곡 넣는다.
괴로운 것은 이때부터. 고기와 생선을 손질하는 순서다.
우선 국물용 고기는 한번 끓일 만큼씩 나누어 팩을 해둔다. 불고기감과 갈비는 미리 양념해 재어 놓는다. 꽁치는 머리와 꼬리를 잘라내고 가위로 배를 튼 다음 내장을 모두 빼내고(가장 싫은 일. 반드시 일회용 장갑을 끼고 한다) 깨끗이 씻어서 소금을 뿌린다. 오징어는 머리와 다리를 떼고 내장을 빼내 손질한 후 껍질을 벗겨 한번 요리할 만큼씩 싸둔다. 새우는 껍질을 벗기고 등을 갈라 똥집을 뺀 후 씻어서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 놓는다.
이렇게 1차 손질한 것은 3~4일 내에 요리해 먹을 양만을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는 모두 한번 먹을 만큼씩 따로 팩해 냉동 칸에 넣는다. 때로 밑반찬 거리까지 사와 이것저것 지지고, 볶고, 무치다 보면 휴일 하루해가 어떻게 가는지 도무지 억울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언니는 여기에 덧붙여 파를 모두 다듬어 두고 나물들까지 손질해 데쳐 놓는데, 나는 도저히 그것까지는 못하겠다.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밥 해먹고 살아야 하는 대부분의 한인 여성들은 나와 같은 장보기 의식을 거칠 것이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저녁 식사를 준비하자면 기초실력이 있어야 하니까.
거의 항상 마켓에 따라 가주는 남편은 자기가 산 군것질들만 안으로 갖고 들어가 부엌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모르는 체하며 TV를 본다. 그러니 자꾸 마켓에 가자고 조르고, 나는 있는 대로 버텨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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