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는 존 폴스타프라는 뻔뻔하고 뚱뚱한 퇴물 기사가 나온다. 젊은 헨리 5세 왕자를 뒷골목의 방탕과 쾌락의 삶으로 이끈 인물로, 어리석고 부도덕하지만 무거운 역사극에 웃음을 불어넣는 해학적 캐릭터다.
그런데 연극에서 폴스타프의 인기가 높아지자 셰익스피어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또 하나의 희곡을 썼다.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The Merry Wives of Windsor)이 그것으로, 일설에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사랑에 빠진 폴스타프를 보고 싶다”고 요청하여 썼다고 한다.
이 유쾌한 희극에서 늙고 탐욕스런 술고래 협잡꾼 폴스타프는 두 명의 부잣집 마나님에게 똑같은 연서를 보내 유혹하려다 도리어 호되게 당한다. 그의 사기행각을 알아챈 여인들이 주변사람들과 힘을 합쳐 골탕 먹이는데, 빨래바구니에 숨은 그를 템스 강에 던져버리거나, 정령으로 변장한 마을사람들이 사정없이 꼬집고 찌르는 등, 철저하게 망가지는 슬랩스틱 코미디가 펼쳐진다.
지난 주말 LA오페라가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서 개막한 ‘팔스타프’(Falstaff)는 바로 이 폴스타프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진 오페라다. 주세페 베르디가 79세에 완성한 최후의 작품이며, 평생 비극만을 써온 그의 유일한 희극이다. 베르디는 이 마지막 작품에 특별한 열정을 쏟았고, 훗날 “팔스타프를 쓰는 동안 정말 기쁘고 행복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베르디는 결코 희극 오페라를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 로시니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유분방한 음악, 빠른 템포의 앙상블, 유머러스한 리듬으로 각 등장인물을 살아 숨 쉬듯 그려냈고, 심지어 군데군데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를 오마주하기도 했다.
LA오페라의 ‘팔스타프’ 공연은 2013년에 이어 두 번째로, 그때와 같은 리 블레이클리의 오리지널 프로덕션을 사용했다. 그만큼 잘 만들어진 프로덕션이고, 전통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무대다. 사실은 코믹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기대가 크지 않았는데, 전 캐스트의 호연과 빼어난 오케스트라 음악 덕분에 흥겹게 감상할 수 있었다.
몸을 던져 연기하는 팔스타프 역의 베이스바리톤 크레이그 콜클로그는 물론이고, 알리체(니콜 헤스턴)와 메그(새라 새터니노), 퀴클리(김효나), 포드(어네스토 페티), 나네트(디아나 브라이윅), 펜튼(앤소니 레온) 모두가 훌륭했다. ‘팔스타프’는 진정한 앙상블 오페라로서, 10명의 출연진이 모두 잘해야 성공할 수 있는데, 이처럼 전체가 뛰어난 공연도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관주인 퀴클리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효나는 노래도 연기도 돋보였다. 2024년 ‘나비부인’에서 하녀 스즈키 역으로 호연했던 그녀가 이번엔 코믹 연기를 얼마나 잘하던지, 저음으로 인사하는 유명한 “레베렌차~!”(Reverenza)가 극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면서 퀴클리 부인만 나오면 무대가 신나고 즐거워질 정도였다.
이 공연은 제임스 콘론이 지휘하는 마지막 오페라의 하나로, 그는 5월말 개막하는 모차르트의 ‘요술피리’를 끝으로 20년간 이끌어온 LA오페라의 음악감독 직에서 은퇴한다. 그런 만큼 최후의 정성을 다한 그의 음악은 정교하게 아름다웠고, 오케스트라를 또 하나의 배역으로 만든 그에게 관객들은 진심어린 환호를 보냈다.
그런데 팔스타프를 골려주는 짓궂은 장난과 소동의 야단법석이 벌어지는 동안, 한가지 생각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베르디는 왜 희극오페라로 자신의 커리어를 마감했을까?
베르디는 평생 26편의 비극 오페라를 써서 국민영웅으로 추앙받은 거장이었다. 사실 그의 인생도 비극 그 자체였으니, 전도유망한 작곡가로 떠오르던 젊은 시절에 그는 아내와 두 아이를 차례로 잃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다. 그런 상태에서 쓴 희극 오페라가 처참하게 실패한 후에는 아예 작곡을 단념했을 정도다.
하지만 고통과 아픔을 겪고 일어난 후 그는 지금껏 자주 공연되는 불후의 명작들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아이다’ ‘맥베스’ ‘오텔로’ ‘시몬 보카네그라’ ‘가면무도회’ 등 사랑과 질투, 배신과 파멸, 고통과 죽음을 다룬 비극 오페라들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베르디가 노년에 이르러 인간은 본질적으로 어리석고 우스운 존재라며 미소를 남긴 것은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팔스타프’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유명한 합창은 “세상 모든 것은 농담이다”라는 것이다. 베르디가 평생의 비극을 통과한 뒤 남긴 가장 가볍고도 깊은 철학적 통찰이다.
베르디는 이 오페라를 쓴 후에 “나는 평생 인간의 눈물을 썼고 마지막에는 인간의 미소를 남기고 싶었다”고 했고, “그동안 수많은 영웅과 여주인공들을 학살한 이후, 이제야 웃을 여유가 생겼다”고도 했다. 어쩌면 이 오페라는 그에게도 80년의 삶을 치유하는 힐링 오페라였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어리석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우습다, 그러니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웃을 수 있다… 는 통찰은 냉소가 아니라 포용의 웃음, 혹은 초월적 관조에 가깝다.
인생은 짧고, 세월은 빠르고, 우리는 어리석다. 그리고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짜 웃는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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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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