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혜민 셰프.[정혜민 셰프 제공]

8일 서울 강남구 제스트 바에서 열린 발효 세미나에서 연사로 참여한 정혜민(오른쪽) 셰프와 전 노마 발효 연구소 디렉터 제이슨 화이트. [정혜민 셰프 제공]

석탄주와 된장을 곁들인 미루나무버섯 스테이크. [정혜민 셰프 제공]
미식계에서 가장 뜨거운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발효다. 우리에게 발효는 당연한 식생활의 일부지만, 해외에서는 이를 통한 드라마틱한 맛의 변화를 마법과도 같은 기술로 여긴다. 10여 년 전 북유럽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뉴 노르딕(New Nordic)' 열풍은 발효를 단순한 보존 기술에서 현대 미식의 언어로 격상시켰고, 이제 세계의 미식가들은 그 원류 중 하나인 한식의 발효를 주목하고 있다. 이 뜨거운 흐름의 한복판에 서 있는 한국의 젊은 요리사가 있다. 바로 정혜민(31) 셰프다. 그는 뉴 노르딕의 심장부였던 덴마크 '노마(Noma)'를 거쳐, 이제는 한국 발효의 원형을 탐구하고 데이터로 치환해내는 '발효 디렉터'로서 미식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최근 전 노마 발효 연구소 디렉터 제이슨 화이트와 함께 국내에서 발효 세미나를 열며 글로벌 트렌드와 우리 발효의 가치를 알리고 있는 그를 만났다.
음식의 힘에 매료… 무보수 인턴서 정식 요리사로
정 셰프의 요리는 경남 창원의 평범한 집 거실에서 시작됐다. 네 자매 중 셋째였던 그는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일찍부터 자매들과 함께 가족의 식탁을 책임졌다. 그에게 부엌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하루를 보낸 가족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마법 같은 장소였다.
"음식은 결국 사람을 모이게 하잖아요. 제가 차린 식탁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던 그 공기, 그게 좋아서 요리를 시작했어요. 지금도 저는 음식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장 따뜻한 매개체라고 믿어요."
진로를 요리로 정한 그는 남들이 입시에 매달릴 때 현장에서 손끝의 감각을 익혔다. 후회를 모르는 성격과 일단 시작하면 끝을 보는 기질은 그를 좁은 창원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밀어냈다. 스무 살 무렵인 2015년, 정 셰프는 단돈 200만 원을 손에 쥐고 호주 멜버른으로 떠났다. 목표는 당시 세계 미식가들의 찬사를 받던 레스토랑 '아티카(Attica)'였다.
영어도 서툴고 경력도 짧았지만, 수개월간 이메일을 보낸 끝에 무보수 인턴으로 시작해 한국인 최초의 정식 요리사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기술보다 귀한 리더십의 본질을 배웠다.
"메뉴가 자주 바뀌었는데 헤드 셰프가 모든 걸 통제하지 않고 각 파트의 실무자를 전적으로 신뢰했어요. '나보다 이 재료를 1,000번은 더 만져봤으니, 네가 나보다 전문가다'라고 하는 거죠. 누군가의 능력을 믿고 그 포지션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존중의 문화를 처음 배웠던 거 같아요. 그게 제가 헤드 셰프가 됐을 때 큰 자양분이 됐죠."
해외서 빛 본 발효 기법… '한국 발효' 개성 연구
호주에서의 경험을 뒤로한 그는 2019년 당시 세계 미식의 정점으로 군림했던 노마가 있는 덴마크로 향했다. 맨 밑바닥부터 시작했지만, 남다른 열정과 끈기는 곧 빛을 발했다. 인턴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노마의 사령탑이자 핵심 멤버들로 구성된 '테스트 키친'에 발탁된 그는 자신의 레시피를 정식 메뉴에 올리는 성과를 거뒀다. 한국의 명이나물 장아찌 기법을 응용해 내놓은 결과물에 수장 르네 레드제피도 찬사를 보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부채감이 남았다.
"노마에선 발효가 철저히 기록되고 데이터화돼 세계 표준이 되고 있었어요. 정작 우리에겐 훨씬 깊고 복합적인 발효의 역사가 있는데, 세계의 미식가들이 누룩이나 간장을 '코지'나 '소유'처럼 일본식 이름으로 이해하는 게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그때 결심했죠. 우리 발효를 우리의 언어로 정의하고 기록하겠다고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21년 'B3713'의 총괄 셰프, 2024년 뉴욕 '아토믹스(Atomix)'의 한식 연구소 '커먼 에라(Common Era)'의 R&D 셰프를 거치며 한국적 발효의 현대화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천착한 것은 한국 발효가 가진 개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노마에서 본 북유럽의 발효가 소금과 식초를 이용한 일차원적인 접근이었다면, 한식의 발효는 그 구조부터가 다르다고 정 셰프는 이야기한다. 그는 이를 '레이어(Layer)', 즉 시간의 층위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김치를 예로 들어볼게요. 우리가 김치를 담글 때 넣는 액젓은 이미 2, 3년이라는 시간을 견디며 발효된 결과물이에요. 그 발효된 액젓이 신선한 채소와 만나 다시 새로운 발효를 시작하죠. 발효가 또 다른 발효를 덮고, 균이 또 다른 균과 공존하며 만들어내는 이 복합적인 깊이는 단순히 수치로만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우리는 결국 시간 위에 시간을 쌓은 결과물을 먹는 셈이죠."
나아가 한국 발효가 철저하게 문화와 맥락이라는 토양 위에 서 있다는 점도 주목한다. 단순히 풍미를 위한 발효를 넘어 '이맘때면 이걸 해 먹어야 맛있다'는 삶의 지혜와 절기의 감각이 앞선다는 것이다. 최근 화이트와 함께 전국의 생산지들을 돌며 발효 트립을 진행한 그는 충주에서 청국장을 만들고 있는 항아골과 한영석 누룩명인의 발효 연구소 등에서 한식 발효가 나아갈 미래를 목격했다.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현대화를 접목한 분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자연적인 방식을 따르되 공기 순환과 온습도를 정교하게 제어해 일정한 퀄리티를 만들어내시더라고요. 전통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데이터화하는 그분들의 노력이 곧 우리가 세계로 나아갈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그는 생산자들이 보여준 의외의 개방성에도 놀랐다. 비법을 감추기보다, 찾아온 젊은 요리사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 애쓰는 모습에서 한국 발효의 생명력을 본 것이다.
"난 경험주의자… '뉴 코리안' 푸드가 목표"
정 셰프는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라 부른다. 목표를 세워두고 자신을 채찍질하기보다, 매 순간 주어지는 기회에 몸을 던지며 그 과정에서 배움을 얻는다. 호주와 덴마크에서의 화려한 경력을 뒤로하고 그가 특정 레스토랑의 헤드 셰프 자리에 머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노마에서 체득한 것은 단순히 지역 재료를 채집하고 발효하는 기법만은 아니었다. 그가 배운 건 자신이 발을 딛고 선 땅의 재료와 환경을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철학이었다. 단순히 한국에서 북유럽의 음식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독보적인 발효 문화와 절기의 감각을 이 철학적 틀 안에서 재해석해 '뉴 코리안(New Korean)'의 실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다.
정 셰프와 인터뷰 내내 느껴진 건 단단하면서도 맑은 에너지였다. 비자가 취소되어 돌아와야 했던 시기나 코로나19라는 벽에 부딪혔을 때도, 그는 좌절 대신 새로운 레이어를 쌓을 타이밍으로 받아들였다. 가족들과의 끈끈한 유대감 속에서 자란 그는 "언제든 돌아가도 나를 품어주는 가족이 있기에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탄탄한 뿌리가 그가 낯선 땅에서, 그리고 끝없는 발효의 세계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시간의 흐름이 맛의 레이어를 빚어내듯, 정 셰프 역시 자신만의 층위를 다지며 정교한 설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가 정립해나갈 한국 발효의 데이터가 어디까지 닿을지, 그 기록들이 증명해낼 '뉴 코리안 퀴진'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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