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준우가 만난 셰프들 - 정회승 셰프 겸 연마사
흔히 요리사라고 하면 화구 앞에서 불을 다루거나 정교한 소스를 끼얹으며 접시를 완성하는 모습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주방의 시계는 불을 올리기 훨씬 전부터 돌아가기 시작한다. 식재료가 주방에 도착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불이 아니라 칼이다. 요리사는 불을 다루는 사람이기에 앞서 칼을 다루는 사람이다. 모든 요리는 칼끝에서 시작되어 칼끝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식탁 위에 올라온 화려한 플레이팅과 맛의 조화에 감탄하지만, 정작 재료가 처음 칼날과 닿는 그 0.1초의 순간이 맛의 성패를 가를 수 있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한다. 이는 비단 음식을 먹는 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요리를 업으로 삼는 이들조차 이 기본적인 절삭의 미를 잊고 지낼 때가 많다. 요리사의 길을 걷다 돌연 칼을 가는 연마사로 전향해 외식업계에 칼맛의 본질적인 의미를 다시 묻고 있는 정회승(36) 셰프를 만났다.
■주방 악습에 일본 유학, 연마에 매료되다
정 셰프의 유년 시절은 여느 요리사의 성장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이 농번기 때 늦게 귀가하시면, 초등학생 소년은 배고픔을 달래려 직접 밥상을 차려야 했다. 가족들이 자신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때 느꼈던 보람과 따스한 기억은 그를 자연스럽게 요리의 길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졸업 전 조리 자격증 세 개를 손에 넣었고, 이후 조리과 대학을 나오며 차근차근 요리사로서의 기틀을 닦았다.
하지만 2013년, 부푼 꿈을 안고 입문한 일식 주방은 그가 상상했던 세계와는 사뭇 달랐다. "당시 일부 남아있던 주방 내 폭언과 폭행이 공공연히 묵인되던 곳이었어요. 쇠젓가락인 '모리바시'로 옆구리를 찔리고 발로 차이는 일도 비일비재했죠." 그는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만, 몸과 마음이 지쳐가던 그 시기가 돌이켜보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날이 무뎠던 때였다고 덤덤하게 회상한다.
깊은 상처를 받은 그는 잠시 요리를 내려놓기도 했지만, 다시 그를 일으킨 건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먹는 사람에게 전해진다'는 요리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일류 셰프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일본 요리를 깊이 파고들기 위해 2014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요리에서 칼질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선 수행(修行)에 가깝다. 정 셰프가 입학한 쓰지 조리학교는 졸업 때까지 모든 실기 시험 항목에 '칼의 연마 상태'를 포함할 만큼 이를 중요하게 여긴다. 칼의 상태가 곧 요리를 대하는 요리사의 마음가짐을 투영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 셰프는 이곳에서 칼질과 연마의 깊이에 매료됐다.
■"예리한 날이 풍미 살려" 대가 밑에서 단련
유학 생활 6년 차, 귀국을 몇 달 앞두고 그는 인생의 항로를 크게 바꾼다. 요리사로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요리를 좋아했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사업의 본질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라면, 그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면서도 동료 요리사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얻은 답이 바로 '칼 연마'였다.
그는 일본 연마의 대가 후지와라 마사시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스승인 후지와라 역시 방황 끝에 우연처럼, 혹은 필연처럼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업을 잇게 된 인물이었다. 정 셰프는 스승이 좋아하는 떡볶이나 치즈 닭갈비 같은 한국 음식을 직접 만들어 선물했다. 밀키트가 생소하던 시절 스승이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 정성은 장인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여는 결정적인 키가 됐다. 처음에는 손님으로서 질문 보따리를 풀며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단계였지만, 인연이 깊어진 후에는 공방의 일을 직접 돕고 의뢰 들어온 칼들을 대신 갈아내며 전문가 수준의 기술을 체득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집중력은 무를 얇게 돌려 깎는 '가쓰라무기' 대회에서 증명됐다. 20분 동안 무 한 토막을 끊어짐 없이 얇게 깎아내야 하는 2024년 대회에서 그는 5.62m를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3시간 동안 15m를 깎아낸 기네스 기록 보유자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실력이었다. 길고 얇은 무 띠는 기술의 과시라기보다, 연마사가 칼의 성질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숫돌 위에서 자신을 얼마나 다스려왔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흔히 '칼맛'이라는 표현은 요리사들 사이에서도 미신이나 과장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 셰프는 이를 식재료의 구조적 특성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아이들이 왜 양파나 당근 특유의 맛을 싫어하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칼이 무디면 채소를 썰 때 가해지는 압력 때문에 세포벽이 터져버려요. 그때 흘러나온 즙이 산소와 만나면 쓴맛과 매운맛이 강해지거든요. 예리한 칼로 세포 사이를 단숨에 베어내면 잡맛을 내는 즙이 덜 나오게 됩니다. 그만큼 채소 본연의 향과 단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거죠."
그가 연마한 칼로 썬 채소의 단면은 거울처럼 매끄럽고 윤기가 흐른다. 짓눌려 잘린 채소와 베어져 나간 채소의 차이는 입술과 혀에 닿는 촉감에서부터 확연히 갈린다. 요리사들이 말하는 칼맛이란 결국 재료의 조직을 존중하며 베어내는 디테일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장인은 지식 나눠야" 연마 기술 보급 계획
정 셰프는 요리사가 직접 연마를 해야 하는 이유로 '마음가짐'을 꼽는다. 숫돌 앞에 앉아 날을 세우는 시간은 요리사로서의 초심을 다지는 의식과도 같다. "잘 정돈된 칼을 쥐었을 때 느껴지는 미묘한 고양감이 있어요. 그것이 요리사를 바로 세웁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재료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접시 위에 고스란히 담겨요. 도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그 불안함은 결국 결과물에 영향을 주게 마련이니까요."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일본 장인들이 사용하는 '엔토(円砥)'라는 거대한 원형 숫돌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에서 들여오려면 수천만 원이 드는 장비지만, 그는 국내 엔지니어들과 협력해 이 시스템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했다. 굳이 연고도 없는 안산에 작업장을 만든 이유도 원하는 연마 도구와 기계를 직접 제작하기 위해서다.
정 셰프는 자신을 고립된 전통 장인으로 규정하기보다, 누구나 다가가기 쉬운 '칼 멘토' 같은 현대식 장인이 되기를 꿈꾼다. 많은 사람이 인정해줄 때 비로소 장인이 된다고 믿기에, 그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매뉴얼화해서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다.
"과거의 장인이 폐쇄적이었다면, 현대의 장인은 기술을 공유해야 한다고 봅니다. 무조건 감으로 하라고 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죠. 각도가 왜 그래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이해한다면 누구나 연마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습니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셰프들의 칼을 갈아주면서도 꾸준히 연마 클래스를 여는 이유도 이와 같다. 그는 칼 연마를 구독 서비스로 만들거나 인공지능(AI) 로봇을 활용해 보급형 연마를 대중화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자신의 손을 거치는 칼은 한정되어 있지만, 기술이 녹아든 시스템을 통하면 수만 명의 식탁에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단순히 날카로운 칼을 만드는 공장이 아니다. 그는 언젠가 연마 공방과 칼 판매 숍이 함께 있는, 칼 연마와 재료의 본질적인 맛을 연구하는 공간을 꿈꾼다. 일본의 '노미(Nomi)' 레스토랑처럼 칼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여 기술과 맛을 논하는 공간을 한국에도 세우고 싶다는 그의 꿈은 이미 숫돌 위에서 서서히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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