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타운에서 윌셔 길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대로를 가로지르는 교각 같은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지난 몇 년간 공사가 계속돼온 LA카운티미술관(LACMA)의 새 뮤지엄 빌딩이다. 오랫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신축건물, ‘데이빗 게픈 갤러리’(David Geffen Galleries)의 내부가 드디어 공개됐다.
라크마는 지난 26~28일 새로 지은 갤러리 안에서 재즈음악가 카마시 워싱턴의 연주회를 열고 미디어와 일반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건물 내부를 오픈했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텅 빈 콘크리트 공간에서 미술품보다 음악을 먼저 선보인 이 행사에는 사흘간 6,000명이 참석, 축제 분위기 속에서 처음 보는 풍경과 음악을 즐기며 새로운 라크마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데이빗 게픈 갤러리는 시공 전부터 미술계와 건축계의 혹평을 받아왔다. 가장 큰 비난은 타르가 흘러나오는 물결모양의 단층 콘크리트 건축물이 윌셔가를 넘어가는 디자인으로 ‘프리웨이 고가도로’ ‘톨 부스’ ‘공항터미널’ 같다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공모를 하지 않고 마이클 고반 관장이 직접 건축가 피터 줌터(Peter Zumthor)에게 맡겼다는 점, 전시공간이 철거된 4개 건물의 합보다 오히려 축소됐다는 점, 콘크리트 벽은 그림을 걸기도 힘들고 그림의 배경으로도 적절치 않다는 점, 신축건물에는 수장고와 직원 사무실공간이 없어서 건너편의 고층빌딩 5개 층을 임대해 사용한다는 점, 단위면적 당 건축비용이 타 미술관들에 비해 턱없이 높다는 등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도 디자인만큼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세계적인 뮤지엄은 건물 자체가 예술작품이어서 이를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라크마의 신축안은 단선적이고 평범해서 건축적 아름다움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부정적인 선입견이 이번 첫 방문에서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60여개의 층층계단을 올라가 30피트 상공에 띄워서 지어진 거대한 갤러리 내부로 진입한 순간, 놀라운 광경에 잠시 멈칫했다. 일단 너무 크고, 넓고, 길었다. 11만 스케어피트라는 엄청난 공간, 축구장 3개 크기의 공간이 한 층에 수평적으로 펼쳐져있다고 생각해보라. 건물을 단층으로 지은 디자인은 예술품에는 위계질서가 없다는 고반 관장의 신념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통유리로 보는 도시 뷰가 특별한 선물이었다. 드넓은 건축물은 360도 전면이 유리로 돼있어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탁 트인 전망을 보여준다. 마치 뮤지엄 안에 도시를 들여놓은 것처럼 어디서도 경험하기 힘든 풍경, 어느 코너에서나 영화 같은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뮤지엄을 한 바퀴 돌기만 해도 최소 3,000보, 멀리는 할리웃 산, 가깝게는 재패니즈 파빌리온과 라브레아 타르핏, 서쪽으론 라크마의 레스닉 파빌리온과 BCAM, 시티 라잇과 영화박물관의 돔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윌셔 대로를 동서 양방향으로 조망할 수 있다.
건물 안쪽에는 20여개의 전시 룸이 콘크리트 벽으로 구분돼있는데, 이를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걷다보면 방향감각을 잃고 미로처럼 헤맬 정도로 수많은 벽과 복도와 창을 만나게 된다. 건물 형태가 직선이 아닌 아메바 같은 곡선이어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장면이 펼쳐지는 것인데, 이것은 건물을 겉에서 볼 때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한편 수평적으로 너무 넓게 퍼진 공간이라 상대적으로 천정이 낮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또 눈 돌리는 곳마다 사방이 콘크리트 벽이어서 단조롭고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뼈대만 서있는 날 것의 모습이니 여기에 예술품이 들어찼을 때는 얼마나 다를지 기대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다.
음악회는 황혼 무렵에 열렸기 때문에 서쪽에서 오는 석양이 뮤지엄을 내부까지 붉게 물들였다. 이를 보면서 하루 종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광이 전시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졌다. 관람자의 감상도 달라지겠지만 작품의 보존 면에서 괜찮은지 말이다.
새 건물의 건축비용은 당초 예산을 훌쩍 넘어 7억5,000만 달러 이상 소요됐다. 하지만 모금캠페인은 이를 초과달성해 8억4,000만달러를 모았다니 무난한 완공이 예상된다. 건축공사는 작년 말에 끝났고, 지금은 조경과 조각정원, 극장, 식당, 카페, 스토어의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과거 아만슨 빌딩 안에 있던 토니 스미스의 ‘스모크’는 이미 북쪽 입구에 세워졌고, 이전 정원에 있던 칼더와 로댕의 작품도 새로운 자리를 찾을 것이다. 또 새로 구입한 제프 쿤스의 37피트 꽃나무조각품(‘Split-Rocker’)이 남쪽캠퍼스에 설치되면 LA의 명물이 될 것이란 기대도 있다.
데이빗 게픈 갤러리는 기획전이 아닌 소장품(permanent collection)의 전시공간이므로 총 15만점의 컬렉션 중 엄선된 약 3,000점의 설치가 올해 말부터 시작될 예정이다. 비평가들은 일단 내년 4월 개관 후 미술품의 설치를 보고 평가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긴 이제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쁜 점을 들추기보다 좋은 점을 찾아 즐기고 사랑하는 수밖에. 고반 관장의 말대로 “예술은 길고 뮤지엄은 짧다.” 라크라의 새 건축물을 ‘사랑할 결심’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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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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