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혜명 ‘체리 블러섬’
버스 뒷 칸에 간신히 끼어 탄 우리
내 거친 손톱이
사랑스런 타인의 스웨터의 올을 잡아당기고
그렇게, 우리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될 때
서로에게서 달아나려는 듯한 포옹의 그 순간
우리 둘 다 반지를 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녀도 눈치챘는가가 나는 궁금하던
우리가 연출하는 이 대본보다
덜 점잖은 그 대본 속에서
스치는 손가락들이
기분좋은 마찰 속에 불타오르고
그렇게 몇 번의 버스를 탄 후에
마침내 그녀는
나의 아내가 되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하지만 오늘날의 버전은, 서로 너무 미안해하며
각자의 생이라는 픽션의 플롯을 따라,
재빠르게 갈라서 버리지-- 서로 다른 길로
Donald Levering‘미안합니다’ 전문
임혜신 옮김
이런 낭만이 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이라면 자칫 뺨 맞는 상황이다. 스쳐가는 타인에게 촌음도 할애할 수 없이 우리들의 마음과 몸은 바쁘다. 그야말로 별별 인간들이 넘치는 이 복잡하고 신뢰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늘 타인을 경계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아날로그적으로 만나던, 그 디지털 이전의 세상은 사라져가고 마치 게임같은 디지털 세상만 어마어마하게 자라나고 있다. 사람들은 그저 스쳐갈 뿐이다. 만원버스에서 이렇게 만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기도 했던 그 시절은 갔다. 사랑의 대본은 바뀌없다. 미안합니다, 하면서 빨리 비껴가야 한다. 곁을 주고받을 틈이 없다. 오직 코미디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 손끝과 손끝이 스쳐 이루어지던 사랑같은 운명적 우연들의 가치는 완전히 추락하고 말았다. 이 시는 그 추락의 기록이다. 임혜신 <시인>
<
Donald Lev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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