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만나고 35년이 흘렀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우리는 무던히도 쏘다녔다. 에어콘도 없고 창문도 손으로 돌려 올리고 내려야 하는 아주 작은 차였지만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눈이 많이 내린 겨울 어느 날, 대관령 고개를 넘다 그 시절에는 기상 예보가 잘 맞지 않아서 그랬는지 모든 차가 정지해버렸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결국, 차에 기름이 떨어져 길 한복판에 차를 세우고 어디까지 걸어 주유소를 다녀오며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던 젊은 남자였다. 여자에게는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는지 차에서 꼼짝 말라며 당부하고 기어이 무릎까지 차오른 깊은 눈을 파헤치고 기름을 받아온 그 모습이 지금도 눈처럼 하얗게 내 눈에 찍혀있다.
어느 무더운 여름엔, 소금강 언저리 계곡에서 발을 담그다 근처 유명한 산을 돌며 뱀 사냥을 하는 지금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의 눈빛이 얼마나 예리한지 흠칫 놀라기도 하고 산새에 잠시 차를 세우고 한껏 멋을 부리며 찍힌 사진 속의 우리는 왜 그리 젊은지. 그 햇살, 그 눈빛, 그 웃음이 내 귀에 웅웅거리다 멈춘다. 소금강의 짠내는 산에서 풍기는 수풀 냄새였을 텐데 그 여름의 풀 소리가 왜 지금도 그리 찐하게 마음을 울리는지, 그 추억이란 기억의 장면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흐릿한 영상이지만 불면의 필름처럼 머리에 새겨져 있다.
낡아 빠진 기억의 필름이 어느덧 30여 년이 흐르고 그동안 세 명의 아이가 줄지어 서 있다가 이제 모두 떠났다. 다시 둘이 되었다. 그때의 추억을 이번 여행에서 소환하기를 꿈꾸며 부산 기장을 향했다. 하지만 세월을 이길 장사가 있을까? 그때보다는 에어컨뿐만 아니라 성능 좋은 차를 가지고 있고 좋은 호텔을 갈 수 있고 비싸고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건만 나이 또한, 더했음을 잊고 있었을까?
좋은 차는 체력에 밀리고 빠른 비행기는 공항까지의 거리에 밀려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최장 거리 부산으로 향했다. 대도시의 변화는 달리는 말이 아니라 날아가는 비행기 속도처럼 변화된 도시의 빌딩 숲은 시골에서 상경한 촌사람이 되기에 충분했다. 바다를 관통해 도시와 도시를 잇는 광안대교나 그 끝 언저리에 택시 기사도 움찔한다는 롤러코스터 원형도로는 우리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부산역에서 1시간쯤 걸려 용궁사에 도착했다. 용궁사는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에 이어 한국의 3대 관음 성지중의 하나라고 한다. 일단 멀리 보는 절의 모습은 용왕님이 바닷가를 거닐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처럼 바다 끝 모래 위에 넓다란 바위가 살포시 내려앉은 모습으로 바닷속 선녀들이 바위 위에 앉아 나뭇잎들이 바위를 휘감아 놓고 춤을 추는 듯 넘실댔다.
좁고 기다란 소박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대웅전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듯하더니 휘몰아치는 절벽의 파도 소리가 신을 만나기 전 마음을 다잡으라는 것처럼 굉음으로 들렸다. 하마터면 머리를 닿을뻔한 낮고 작은 입구 또한, 낮은 자세로 임하라는 계시로 느껴져 저절로 숙연해졌다. 단상에 계시는 부처님의 모습도 소박하기 짝이 없어 설악산의 신흥사나 서울 한복판에 있는 조계사 같은 절에서 느끼는 단조롭고 웅장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 단아하게 앉아계신 모습에 일단 마음이 턱 하니 놓였다.
초를 올리고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타국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조용하지만, 열심히 살아내 준 가족의 건강과 행복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야 할 아이들의 앞날에도 축복을 기원하고, 그 중심에 서 있는 남편의 건강을 지켜달라는 간절함으로 낡고 닿아 빠진 맨질하고 구멍이 숭숭한 마룻바닥에 머리와 무릎을 조아렸다. 그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풍광은 마치 깊은 산속에서 지평선 너머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나 혼자만이 온 세상을 관망하는 초연한 스님이 된 듯 인생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왔다가 사라지는 흰 구름이 되어 훨훨 날아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 꽃송이 하나도 제자리를 이미 알고 바람과 공기, 작았다 커지는 부피 등 모든 시련을 견디다 땅에 떨어져 사라진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치는 박수 소리 한 번도 이미 정해져 있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조금 게을러지는 것도,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어 누구나 미리 걱정할 것 없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행복하면 그뿐이라는 가르침이 진정한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30여 년 만에 둘만의 단란한 여행길은 재잘거리는 아이들 대신 속삭이는 마음의 길잡이가 우리에게 더없이 넓고 푸른 바다가 편안함을 이야기하고 하염없이 흔들리는 푸른 나무들이 앞으로의 여정을 잔잔하게 손짓한 소중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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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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