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맞아 고국을 방문하는 미주 한인들이 많은 요즘,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광화문 거리를 걸었던 시간이 떠오른다. 작년 여름, 나는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에 휴직 의사를 밝혔다. 미국으로 주재원 발령이 난 남편과 함께 6살 난 아이, 뱃속에 자리잡은 태아를 데리고 미국에 가기 위해서 였다.
광화문으로 마지막 출근을 하던 날, 몇 년 간 모아온 자료가 담겨있던 노트북을 깨끗하게 포맷하고, 잘 다녀와라, 돌아와서 만나자며 사람들과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퇴근하는 인파들이 썰물처럼 광화문역을 지나간 후에도 나는 회사 인근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는 대신, 광화문에서 시작해 인사동까지 앞으로 몇 년 간 보지 못할 서울의 야경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뱃속에는 이제 곧 미국에서 출산할 둘째 아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아기에게 미안하게도 나는 자꾸 슬픈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곳이 그리워질 시간을 상상했다. 그리움마저 준비해야 할 만큼, 당시 나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곳에 갈 걱정과 불안함에 잠 못 이루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액정에 보인 글씨는 ‘저녁 8시, 양치’. 집에 돌아가 아들 양치 시켜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간 내 일상은 9개의 알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새벽 5시 기상 알람으로 시작해 아들의 돌봄과 회사 업무들을 빠짐없이 수행하기 위한 알람이다. 단 몇 분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었다. 내가 일정을 펑크내면 아이의 일상에도, 나를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사해 오신 부모님께도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부모 님, 아이 이렇게 세 명이 꽉 짜인 체계를 만들어 수레바퀴 같은 일상을 맴돌고 있었다.
거세게 굴러가던 수레바퀴 아래로 내려온 것이 내 인생에 어떤 변곡점을 가져다 줄까. 나는 미국에 와서 나를 굴리던 9개의 알람을 껐다. 남은 건 새벽 4시 기상 알람. 나는 아이들과 남편이 깨기 전, 새벽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왜 돈을 벌어야 하고, 왜 일을 해야 하는지 묻기 시작했다. 둘째의 새벽 기상 때문에 이 알람이 소용 없을 때도 많지만, 나는 아이 울음 소리 때문에 억지로 일어나기 보다 이 알람을 들으며 스스로 일어나고 싶다.
내년 여름이 지나면 우리 가족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때 내가 다시 광화문 거리를 걷는 다면 또 어떤 느낌일까. 작년의 나와 내년의 나는 아마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게될 지 모른다. 하지만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이 타인의 기대나 강요가 아니라, 내가 미국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 결과로 움직이는 산뜻한 힘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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