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자연은 왜 이리 슬퍼보일까---.”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소설에서 그는 이렇게 되뇌었다. 대한민국의 봄은 슬퍼보이지는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봄과 다르게 초록은 짙푸르디 푸르렀다. 초록은 3월이 훌쩍 넘어 시작되었건만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식목 국가의 명성에 월계관을 씌워주는듯 하였다. 그 푸름 속에 꼭하나 슬퍼보이는 게 있긴 있었다. 해송. 꿈틀거림과 뒤틀림이 바닷바람에 시달리고 시달려 한뼘 자라기를 미친 몸부림으로 이루어냈으니 장해보이기 보다는 슬퍼보였다. 이곳의 소나무 군락지의 눈을 압도하며 뾰족뾰족 훌쩍한 큰 키의 위세당당한 그것에 비하면 더욱 슬퍼보였다.
소설의 지식인은 말미에서 이렇게 또 지껄인다. “이상견빙지, 이상견빙지.”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라는 뜻이다. 해송은 날마다 “오늘은 서리일지라도 내일은 얼음이 되지 않게 하소서” 기도하지 않았을까? 그 앞은 세어보지 않는다해도 일제 강점기, 그들이 딛고 있는 시대가 ‘서리’가 아니며 그 뒤에 올 시대가 ‘얼음’이 아니길 바라며 숱한 세월을 보낸 가슴이 굽고 허리가 뒤틀린 해송이 어디 한두그루였을까? 그래서 숫자라도 세계 21위 민주주의 지표를 달성한 늙고 뒤틀린 해송을 측은해서 꼭 안아드리고 싶은 아버지의 주름살과 닮았다고 느낄 수밖에.
시대는 우리를 해송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한 집에 아버지가 둘이어도 괜찮고 어머니가 아버지도 되고 남자가 남자를 품고 남녀가 유별이건만 공공장소에서 한 화장실과 샤워실을 쓰며 남자인듯 여자인듯 아니 차라리 남자와 여자 묻기를 합법적이지 않다 말하는 이시대에 소나무이기를 원한다면 해송이 되는 수밖에.
오늘 서리를 밟으며 내일 얼음이 두터워 질 것을 안다지만, 혹은 얼음 끝에 언제나 흐르는 시냇물로 봄을 선사한 그 자연을 닮는다면 이 시대의 끝에 봄이 올 것이라고, 우리가 해송이어도 바다를 바라보며 아주 작은 한뼘의 기지개를 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나는 과연 ‘패강랭’(이태준의 1938년 소설)의 ‘현’보다 눈이 어두운 자일까? 아 참! 수십 년을 푸르게 커왔지만 불과 1년만에 푸른 솔잎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완전히 죽어버린 고사목 소나무, 그는 재선충에 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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