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교는 나의 사명”...한국불교 미국전파 선각자
잭슨하이츠 시절 법회에 임한 법안스님(왼쪽). 그옆이 관응 큰스님, 혜관스님.
1974년 미 학계 시찰중 뉴욕에 법당 필요성 절감
동국대 부총장 사임하고 뉴욕서 원각사 창립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뉴욕일원의 한인 종교기관은 기독교 계통이 전부였다. 뉴욕한인교회가 1921년 맨하탄에서 창립됐고 해방후 브루클린에서 창립된 뉴욕한인중앙교회(1963년)와 퀸즈한인교회(1969년) 등이 있었다. 1970년에 접어들면서 롱아일랜드한인교회, 뉴욕장로교회 등이 뒤를 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인들의 타종교 뉴욕진출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1974년은 천주교와 불교가 뉴욕 한인사회에 자리잡은 원년으로 기록된다.
퀸즈성당은 73년 4월29일 퀸즈 레고팍 ‘Our Lady of Angelus’에서 12가정 37명의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정토마스 신부가 미사를 봉헌함으로서 출발했지만 행정적으로 브루클린 교구청의 한국어 미사에 대한 공식적인 봉헌 승인이 난 것은 74년 9월말이었다. 이무렵 뉴욕의 불교계도 이미 꿈틀거리고 있었다. 몇 가정의 신도들이 모여 가정법회 수준을 유지하던 시절 동국대 부총장 오법안 스님이 뉴욕을 스쳐가는 일정이 있었다. 그가 1974년초 동국대 부총장의 직함으로 미국학계 시찰 중 뉴욕에 들렸을 때 동국대 뉴욕동창회가 마련한 환
영회에서 수많은 불교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로부터 뉴욕에 법당을 세워달라는 간절한 당부에 접했다. 의외였다.
하버드 대학을 둘러보고 나서 그가 느낀 것은 동부 일류대학의 시설과 규모가 엄청난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에 대한 연구도 심오하게 진행되는데 또한 놀랐다. 그와같은 학문 분위기는 평소 그가 품고 있던 연구의지를 살려내어 현지에서 교환학자 신청을 하게 되었다. 하버드 신학대학원으로부터 허가가 쉽게 이루어져 1년간 머무르게 되었다. 기숙사와 연구실을 제공받았고 듣고 싶은 강의, 연구하고 싶은 테마들을 가지고 학내 교수들과 자유스럽게 토의도 할수 있었다. 그해 5월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사가 플러싱의 권성도 보살집에서 열렸을 때 초청을 받았다.
250여명의 신도들이 모인데다 한때 뉴욕에서 법회를 한 적이 있는 구윤각 스님(일본 동경 흥법원)이 참석하여 뉴욕에 절을 세우자는 구체적인 논의가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법안 스님은 이때 신도들의 간청을 물리칠 수 없어 승락한 것이 한 달에 두 번씩 뉴욕에서 설법을 하게 된 것이었다. 신도들은 타임스 스퀘어 부근에 빌딩 사무실을 세내어 간이 법당을 차려놓고 모이다가 그해 8월8일 맨해튼 20가 브로드웨이 부근 로프트 빌딩 한 층을 빌려 원각사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뉴욕 최초의 한국사찰 원각사가 창립된 배경이다.
원각사를 창설하면서 그는 미국학계에서 한국불교가 당하는 분통 터지는 일들을 시정하겠다는 결심이 섰다. 미국에 오면서 그가 당한 분통터지는 일이란 중국, 일본, 심지어 티베트의 불교문화가 상당히 소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불교문화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동부의 명문대를 다 둘러봐도 한국 불교문화를 소개한 영문책자 한권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해 하버드 코스가 끝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뉴욕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동국대에는 부총장 사임서를 우송했다. 어디서건 포교를 하는 일도 하나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 국내의 어지러웠던 종단내 분규도 그를 잡아두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렇게 창립된 뉴욕 원각사는 초창기 신도 50명으로 시작했고 78년에야 13만달러의 모금이 이루어져 비좁은 법당을 면하는 신세가 되었다. 퀸즈 잭슨하이츠 74가에 20만 달러짜리 건물을 매입해 독자적인 불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법안은 그때 법당 마련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를 학문적으로 미국사회에 소개해야 되겠다는 속셈으로 연구소 인가까지 정식으로 받았다. 신도수가 점차로 늘고 사찰로서의 면모가 갖추어진 81년 원각사는 잭슨하이츠 건물을 45만
달러에 팔고 그 금액으로 맨하탄 17가의 로프트 빌딩 3개층을 코압으로 사들여 총 1만5,000 스퀘어피트의 보다 널찍한 장소로 옮겼다. 그곳서 또 4년만에 150만달러의 매매가 이루어져 예기치 않은 부동산 소득이 생겼다.
복잡한 맨하탄을 떠나 한시간쯤 거리에 산사 정취가 풍기는 이상적인 장소를 물색하다가 1985년 뉴욕주 업스테이트 Salisbury Mills의 228에이커 대지를 사들여 법당을 세우고 그곳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다. 유대인들이 여름캠프로 사용하던 시설로 호수, 축구장, 수영장 외에 방갈로가 30여개나 되는 장소여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 당시 등록자 1,400명, 매주 법회 참석자 200여명 규모로는 옹색치 않은 명당자리였다. 뉴욕근교에 그럴듯한 수도원을 세우고 한국의 불교문화를 미국에 본격적으로 전파하려던 그의 꿈은 그렇게 실현되고 있었다. 호탕 박식하고 전통유학과 불교, 현대학문에도 능했던 그는 미주에 불심을 심는데 가장 큰 공헌을 남긴 스님으로 기록된다. 그보다 조금 앞서 포교를 시작했던 숭산스님은 미국사회에 잘 알려져 있지만 한인사회에는 법안스님이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32년 전북 남원 출생으로 본명은 영봉, 전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하던 24세때 불가에 입문했다. 법주사-직지사-통도사-조계사 서울 총무원-용주사 등에서 수도했으며 종단에 들어간 후로 조계종 교무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63년 동국대를 비구승들이 인수할 때 김법린 총장과 함께 학교재단 서무국장으로 들어가 재단 상무, 부총장으로 승진했고 75년에 사임했다. 원각사가 현 위치로 옮겨간 이듬해 그는 스트로크로 쓰러졌다. 시봉을 잘 받은 덕에 90년대 초까지는 설법을 했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한동안 의식이 흐려졌다가 2007년 입적했다. 절의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한때 정오 큰스님(전 통도사 주지)이 주지로 취임했으나 상주할 수는 없었다. 사찰내 방갈로 등 낡은 건물들이 방치됐고 폐허상태로 남은 시설들이 많았다. 그만큼 법안스님의 그림자가 컸던 셈이다.
정오 큰스님 때 시작된 도량정리가 어느 정도 힘을 발휘했고 2009년 지광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원각사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지난해 대웅전, 선방, 요사체, 납골당 등 계획을 세웠고 270만 달러의 모금도 이루어졌다. 금년 건축허가를 앞두고 원각사의 재건사업이 실현되는 희망의 새바람이 불고 있다.
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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