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2시에 일을 마치자 마자 컴퓨터 가방을 들고 스타벅스로 향했다. 커피를 만들어 주는 바리스타와 대충 눈 인사 하고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 .-1960-)의 1957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에 빠져 들었다.. 수상 연설문 중에서 그는 “예술은 고독한 향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괴로움과 기쁨의 유별난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수단입니다” 라고 말했는데 많은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가 불행하면 작가는 행복하다>는 말이 있지만 까뮈 역시 이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복한 작가일 것이다. 여기에서 행복하다는 것은 작가로서 고뇌와 방황을 할 수 밖에 없는 외적 요건이 오히려 깊은 사유의 내적 요인으로 전환이 된 고통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과 고뇌를 하지 않는다면 깊이 있는 진정한 작가의 길은 요원할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까뮈는 누구보다도 내적 사유가 깊은 최대의 실존주의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가올 미래의 시대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적 글쓰기( 인터넷 상에서 링크와 링크의 고리를 통해 작가와 독자가 함께 여러 갈래의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는)가 문학을 주도할 예감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여전히 독자는 알베르 까뮈식의 글쓰기에 더욱 감동을 받을 것 같다. 그것은 독자는 작가의 세계관에 빠져들어가고, 작가는 작가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알제리인으로서 가난한 광산 노동자의 아들로 프랑스에서 태어난 알베르 까뮈는 자기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살아왔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일찍 여위고, 또한 벙어리처럼 침묵의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까뮈는 철저한 삶의 고통을 해소하는 일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길을 가다가 돌멩이가 발에 채일 때 누구는 걸림돌이라고 하고 누구는 디딤돌이라고 받아들이는 관점이 다르듯이 까뮈는 어려운 삶을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디딤돌로 생각했을 것이다. 까뮈가 노벨상을 받던 당시 그는 예술과 작가의 역할이란 문제에 대해 집요하리만치 깊게 파고 들었다. 이 화두는 언제나 존재하며 갈등 구조를 낳기도 하는데 그는 작가란 “글을 통해 이름 모를 한 수인(囚人)의 침묵을 메아리 치게 하는데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꼭 작가가 아니더라도 밥 딜런(Bob Dylan)이나 부르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같은 가수는 노래로써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세계의 침묵을 깨우기도 한다. 어쩌면 예술은 고립된 존재가 아닌, 까뮈의 말을 빌리자면 “가장 겸허하고 보편적인 진실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노벨상 수상 소식을 까뮈에게 전해 준 스웨덴 대사는 까뮈를 지칭하여 “ 그는 이 분별력 없는 세계 속에서 창조와 행동과 인간의 고귀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반항인 일지도 모른다” 라고 그의 존엄성을 피력했다. . 그가 죽은 지 50 년이 넘었지만 그는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가슴에 고귀한 반항인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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