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구정이 되면 어린 시절에 보냈던 설날이 생각난다. 지금 한국에서는 이웃집을 돌면서 어른들에게 드리던 세배의 풍속도 사라지고, 가까운 친척의 집을 찾아가는 일도 없어진 듯 하다. 친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찾아가는 일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서, 더러는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 고모들에게서 세배돈을 받게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에는 동네를 돌면서 세배도 드리고 제법 먼 곳에 있는 가까운 친척들을 찾아 설날은 집집마다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대부분 남자아이들이 세배를 다니고 여자애들은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누구인가 세어보거나, 집에서 손님접대의 잔심부름을 돕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가난하였던 그 시절에 만져보는 세배돈은 귀하고 귀한 돈이어서 아이들은 설날을 기다리는 재미로 사는 듯도 하였다. 우리집에는 특히 세배를 오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며칠 전 부터 은행에 가서 빳빳한 새돈을 마련해 두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농사를 짓는 것이 주요산업인 시절이어서 농산물을 팔아야만 현금을 만져볼 수가 있을 때였다. 그 때에 아버지에게서 받은 새 지폐의 감촉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자기도 아이들에게 주는 세배돈 만큼은 새 지폐를 장만한다고 말하는 나의 6촌 동생도 있고, 또 다른 6촌 오빠의 딸은 먼 할아버지 뻘이 되는 우리 아버지가 새돈을 주신 그 설날을 이렇게 기억하였다. “ 할아버지가 세배돈을 얼마를 주랴” 하고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많이 많이 주셔요.”라고 말했죠. “ 그래? 얼마나 많이?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잊었으나 어린 나이에 액수를 아주 많이 불렀거든요.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시면서 하아, 고놈! 하시는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그 돈을 모두 주셨어요. 아주 많이요” 돈의 가치를 어려서 부터 알고 있던 그 아이는 자라서 돈도 잘 벌었는데, 자기가 번 돈으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께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비싼 물건을 자주 선물하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가 주신 세배돈에 대한 많은 기억이 있다는데, 정작 나에게는 아버지가 주신 세배돈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다. 다만 우리집에는 설날에도, 또 다른 날에도 언제나 손님이 많이 드나들었다는 것과 또 돈이 필요한 딱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돈을 주셨을 때나, 주시지 못하였을 때나, 돈에 얽힌 사연들이 언제나 너그러웠던 아버지의 마음을 괴롭혔었다는 것을 기억할 뿐. 그러나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돈 가운데에서 가장 기쁨을 준 것은 아마도 세배돈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96세 까지 장수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훨씬 전 부터, 설날이 되었다고 이웃이나 먼친척들이 세배를 하러 아버지를 찾아뵙는 일은 없어지고 말았다.
옛풍속이란 시대의 형편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설날은 연휴에 휴가를 가는 사람들로 공항이 북적거린다고 하지 않던가. 핵가족의 최소단위인 ‘진짜 가족’들이 즐겁게 보낼 설날의 계획을 짜는 것이 아버지들의 임무가 되었다. 자신의 아이들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만들자. 아버지 세대가 받지 못했던 풍요한 삶을 맛보여주자.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주자. 글로벌 시대에 맞는 아버지가 되자. 작심이라도 한 듯 하다.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풍속. 모든 아버지들의 가슴속에는 시절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똑같은 마음이 들어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 될 때, 기억나는 아버지의 세배돈. 아버지, 참 좋은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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