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락기자의 다큐멘터리 ‘타운50년’
웃음 찾아 거리 누비며 연습 또 연습
코미디란 정치, 사회, 문화 등 일반 사람들이 자주 접하는 세상 돌아가는 얘깃거리들을 압축해, 유머와 재치로 웃음을 이끌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 코미디언은 다방면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가운데서 소재거리를 찾아내는 분별력과 순발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만약 관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코미디언이 아니다. 특히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이 직업은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호텔서 노래 부르다 중간중간에 유머
엉터리 영어발음 오히려 박수 받아
자니 카슨 쇼 출연계기 코미디계 입지
미 코미디계에 진출한 대표적인 한인으로 가장 많이 기억되는 인물은 역시 자니 윤씨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생활화 돼버린 유머감각에 금세 매료된다. 그리고 그의 나이가 올해로 71세를 맞이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윤씨는 1962년 성악을 공부하기 위해 오하이오주로 유학을 왔다. 그리고 1965년 진로를 바꿔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세미클래식인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일로 변화를 시도한다. 정통 클래식으로는 생계유지가 힘겨웠기 때문이었다.
1968년부터 호텔 극장 등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16개국 언어로 메들리를 만들어 음악 세계 일주를 시도했고, 기립박수를 받는 뜨거운 반응을 얻어냈다.
물론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그중 발음은 더더욱 큰 문제였다. 한 번은 가사에서 ‘R’과 ‘L’ 발음을 제대로 못해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화끈거릴 일이었지만 윤씨는 밴드에게 반주를 중단시킨 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음이 힘들다”며 정중히 사과했다. 그러자 관객들은 큰 박수와 환호로 답했다.
윤씨는 당시의 일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며 “진실보다 더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2시간 정도 이어지는 공연 중간 중간에 유머를 적절히 섞어 진행했는데, 반응도 좋았고 인기도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뉴욕에 발을 들여놓은 첫 해에만 7만5,000달러를 벌어들였고, 뉴욕 지역 연예인들에게 수여하는 ‘올해의 연예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미 연예계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74년 1월 영화감독의 꿈을 안고 LA로 무대를 옮겼지만, 영화감독의 높은 벽을 실감하곤 ‘코미디언’으로 변신을 꾀한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선셋 블러버드에 자리 잡고 있던 ‘코미디 스토어’란 전문 극장이었다. 오디션을 거쳐 2년간 매일 밤 공연을 했다. 무보수인데다 처음에는 공연시간도 새벽 1시로 배정됐다.
이 당시 코미디언을 꿈꾸며 동고동락하던 인물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영화배우로 성공한 로빈 윌리엄스를 비롯해 토크쇼 제왕으로 자리 잡은 데이빗 레터맨, 제이 레노 등도 역시 무보수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사 20세기 폭스의 부사장 앨런 라이스를 만나게 된다. 그는 윤씨의 재치와 노래 솜씨에 반해 무대 뒤까지 찾아와 명함을 건네주며 “한번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고, 얼마 뒤 한인들도 잘 아는 한국전을 소재로 한 드라마 ‘M.A.S.H.’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본격적인 주류 연예계 진출의 시동을 건다.
그는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길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곧바로 메모했고, 준비한 소형 녹음기로 사람들의 말을 녹음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소재를 개발하고 작품을 만들어 동료들 앞에서 시범을 벌여 반응을 점검했다.
윤씨는 “코미디는 일상생활에서 나온 소재를 과장시킨 것인 만큼 관찰력이 뛰어나야 하며, 간결하고 핵심을 찌를 수 있어야 한다”며 “한 소재거리를 코미디로 살리기 위해 한 달을 연습해야 했다”고 전했다.
이후 1978년까지 한인 영화인의 대부 필립 안과 ‘쿵후’를 비롯해 ‘코작’ ‘러브 보트’ 등에 출연하던 중 중요한 전기를 맞이한다.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생방송 토크쇼 ‘자니 카슨 쇼’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첫 방송은 두 명의 프로듀서 앞에서 오디션을 받은 뒤 곧바로 그 날 출연하면서 시작됐다. 일회 출연료가 750달러였지만 돈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얻었다.
전국으로 방송되는 이 쇼에 총 34회나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높이고, 나름대로 노하우를 쌓았기 때문이다. 이는 훗날 한국에서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라는 유행어를 남긴 ‘자니 윤 쇼’를 진행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1970년대 후반부터 그는 라스베가스로 진출, 주급 2만5,000달러를 받으며 일년에 26주를 그 곳에서 보냈다. 또 미 전역에서 출연 제의가 쇄도해 타주 공연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현재의 골프와 테니스 실력이 라스베가스에서 공연할 당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귀띔했다. 공연이 밤에 열리다 보니 자연히 낮 시간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호텔 소유 골프장과 테니스장을 자주 찾게 됐다는 것.
윤씨는 1980년대 중반 애틀랜타 골든 너겟에서 만난 미 연예계의 지존 프랭크 시나트라를 잊지 못한다.
윤씨는 “당시 그같은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자체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고 특히 ‘내가 너를 인정한다’고 말해 줬을 때는 마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장하다’고 격려해 주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2년간 한국 방송 프로그램에도 진출했던 그는 지금도 공연섭외가 이어져 틈틈이 타주 공연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가정을 가진 뒤로는 타주 공연을 가급적 자제하고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실제로 오랜 시간의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자신의 에이전트로부터 셀폰이 걸려 왔다. 아마 윤씨가 금강산에 새로 생긴 골프장에서 열린 방송국 행사에 참가한 것을 몰랐던 듯 얼마 뒤 열릴 플로리다 공연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
윤씨는 “처음 미국 땅을 밟을 당시 가졌던 영화에 대한 꿈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며 깊은 애착을 드러냈다.
그는 또 마가렛 조 등 한인 코미디언들의 활약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미국인들의 마음을 이끌고 사로잡을 수 있는 연예계에 한인들의 많은 진출을 기대했다.
그는 항상 운동을 한다고 한다. 또 혈액순환과 신경조직을 관리하는 것이 건강한 생활의 비법이란다.
<다음 월요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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