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라크 대사를 역임한 고위 외교관의 부인이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이라는 정보가 새어나가 큰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CIA의 비밀공작원은 신분이 노출되는 순간 위험에 방치된다. 자칫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
CIA요원들은 직업상의 필요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변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신분을 숨겨야 한다. 심지어 친부모와 배우자에게도 ‘정체’를 드러내선 안된다.
CIA 비밀요원인 크리스 이즈도 미셸 해리스와의 첫 데이트에서 자신을 유럽에 주재하는 미 정부 관리라고 소개했다.
미셸과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 CIA에서 은퇴한 이즈는 22년만에 처음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시작했다.
’국제첩보박물관’을 구경가기로 한 날, 그는 차안에서 해리스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평소 수다스럽기까지 하던 해리스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한다던 사람이 국가에 대한 ‘의무’를 앞세워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이즈 처럼 ‘스파이 세계’에서 암약해온 CIA 요원들은 은퇴후 배우자와 자녀, 가족, 친구들에게 그동안 어쩔수 없이 거짓말을 했노라고 고백 할 때가 가장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25년동안 비밀요원으로 일하다가 2001년 4월 은퇴한 캐시 크센은 아직도 모친에게 자신이 스파이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다. 크센은 CIA를 그만둘 수 있어도 완전히 떠날 수는 없다며 21세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말한다.
CIA 인력의 약 20%는 작전부서에 소속돼 해외에서 개인과 정부를 상대로 정보를 빼내거나 특정국의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비밀공작을 수행하고 있다. 대부분은 국무부 및 국방부 관리로 행세하나 일부는 비정부단체나 유령 회사의 직원으로 위장하기 때문에 간첩으로 잡힐 경우 외교적 면책특권을 행사할수 없는 위험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
비밀요원들은 대부분 실명을 쓰지만 정보당국은 이들이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짜 운전면허증과 은행계좌는 물론 세금보고서, 전화번호, 봉급 수표 등을 제공한다.
특히 동서 냉전이 한창이었을 때 비밀요원들은 은퇴한 후에도 죽을 때까지 비밀로 남아있어야 했다. 가짜 전화번호도 혹시라도 전화가 걸려올 때에 대비해 항상 누군가가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또 말이 많은 외교관들과 누가 스파이인지 추측하는 게임을 즐기는 정부 관리들로 들끓는 워싱턴에서는 비밀을 지키기가 더욱 어렵다. 25년동안 CIA요원을 지낸 리처드 브레넌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따분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9.11테러를 계기로 CIA에 대한 인식이 보다 긍정적이 되면서 은퇴한 요원들이 진실을 말하기가 그나마 쉬워지고 있다.
이즈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해리스도 처음에는 말을 하지 못하고 종일 들은 것을 소화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해리스는 며칠 후 이즈의 과거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를 신뢰한다고 말했다. 이즈와 해리스는 올해 말에 혼인식을 가질 예정이다.
<우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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