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불레즈의 탄생 100주년 음악회가 올 초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이어지고 있다. 지난 주말 LA필하모닉은 에사 페카 살로넨의 지휘로 그의 음악유산을 기리는 콘서트를 열었다. 살면서 아주 가끔 잊지 못할 순간을 만나는데, 그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인상 깊은 연주회였다.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 1925-2016)는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이름일 것이다. 클래식음악 애호가들은 아마 그를 지휘자로만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지휘자이기에 앞서 작곡가였고 음악이론가이며 여러 중요한 음악기관의 창립자였다. ‘음악계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릴 정도로 20세기 클래식음악의 지평을 바꾼 그에게는 늘 ‘현대음악의 거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시테 드 라 뮈지크’(음악의 도시라는 뜻)는 프랑스 파리 외곽에 새로 건립된 음악 복합공간이다. 여기에 장 누벨이 건축한 파리필하모니 전용 콘서트홀이 2015년 개관했는데, 그 이름이 ‘피에르 불레즈 그랜드 홀’이다.
독일 베를린에는 2017년 완공된 프랭크 게리 디자인의 공연장이 있는데 그 이름 또한 ‘피에르 불레즈 잘’이다. 음악가의 이름을 기리는 공간이 적지 않지만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들에서 동시대인을 기리는 공간을 잇달아 헌정하는 예는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작곡가이면서 지휘자로 성공한 사람은 한 세기 전의 구스타프 말러가 가장 유명하고, 이후 레너드 번스타인, 앙드레 프레빈, 에사 페카 살로넨이 그 계보를 잇는다. 이들은 모두 작곡이 일 순위였으나 생계를 위해 지휘를 병행하다가 지휘커리어가 더 커진 사람들로, 생애 동안에는 지휘자로 유명했지만 사후 점차 그의 작품이 더 높게 평가되는 음악인들이다.
피에르 불레즈 역시 지휘자로서 더 유명하고 성공적이었다. 그는 1971년부터 뉴욕 필하모닉과 BBC심포니의 상임지휘자였고, 시카고심포니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수석객원지휘자였으며 빈 필, 베를린 필, 런던 심포니 등 많은 유수 오케스트라와 자주 연주했다.
그는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 베베른과 바르톡, 메시앙과 리게티 등 20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주로 연주했기 때문에 보수적인 뉴욕에서는 후원자가 줄어드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에서 감상을 철저히 배제하는 분석적이고 이지적이며 깊이 있는 해석의 연주들로 도이체 그라모폰(DG)의 중요한 명반들을 많이 남겼다.
그는 또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앙상블(Ensemble Intercontemporain)을 창단했고, 퐁피두센터 내에 음향과 음악연구소(IRCAM) 설립하고 이끌면서 전자음악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한편 작곡가로서의 불레즈가 남긴 음악은 그리 많지 않다. 명철하지만 비타협적인 작곡가였던 그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과 ‘음렬주의’를 넘어 ‘총렬주의’ 기법을 사용한 난해한 곡들을 썼는데, 이 때문에 미국에서 그의 음악이 연주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에선 가장 많이 연주되는 현대음악가의 한 명이며 이러한 경향은 그의 사후 두드러지고 있어서 진정한 평가와 유산은 아직 이르다고 보인다.
지난 8~11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열린 살로넨의 불레즈 음악회는 여러모로 놀라웠다. 일요일 낮 2시의 공연장이 만석이었다. 젊은 청중이 많았는가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흰머리 노인들도 많았고 다양한 사람들이 객석을 메웠다. LA만큼 현대음악에 활짝 열린 도시가 드물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것인지, 어쩌면 LA가 사랑하는 에사 페카 살로넨이 지휘봉을 잡았기 때문일까? LA필의 계관지휘자로서 매 시즌 디즈니홀을 찾는 살로넨은 아주 젊은 시절부터 불레즈를 우상처럼 여겼으며, 나아가 그의 음악연주의 권위자가 되었다.
이날 불레즈 프로그램은 ‘노타시옹’(Notations) 4번과 7번, ‘브루노 마데르나를 추모하는 제의’(Rituel In Memoriam Bruno Maderna)였다. 중간에 바르톡의 피아노협주곡 3번과 드뷔시의 ‘바다’도 있었으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노타시옹은 불레즈가 혈기방장하던 20세 때 작곡한 12개의 피아노 솔로음악이다. 연주시간이 각 1분도 안 되는 짧은 음악들인데, 훗날 이를 관현악곡으로 풍요롭고 화려하게 편곡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날 피아노 솔로는 피에르 로랑 에마르(Pierre-Laurent Aimard)가 연주했고, 이어 100명도 넘는 오케스트라가 대편성 확장된 관현악 버전을 연주했다.
하이라이트는 ‘브루노 마데르나를 위한 리튀엘’이었다. 현악, 목관, 금관, 타악기 연주자들이 8개 그룹으로 나뉘어 무대와 객석 곳곳에 배치되었고, LA댄스프로젝트의 무용수 6명이 무대에 올라 춤을 추었다. 각 연주그룹은 지휘자의 큐에 따라 소리를 내었으며, 반복되는 음들이 추모의 영창처럼 되돌아오며 맴돌았다. 연주자와 댄서와 청중이 하나가 되었고, 콘서트홀의 여러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의 파동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현대음악은 우리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가치있고 소중하다. 그런 의미에서 6월 3~10일 있을 ‘서울 페스티벌’은 최전방 K-클래식을 주류사회에 선보이는 첫 음악제이기에 특별히 중요하고 기대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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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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