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책들은 책장에 있을 것이다, 독립된 존재들.
가을 나무 아래 떨어져 빛나는 밤톨처럼,
아직 촉촉한 채로 그들은 세상으로 왔었다.
불길이 타오르는 수평선, 폭파되는 성채들.
행진하는 부족들과
행성들의 운행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손길에 소중히 닿아 책들은 살아났었다.
페이지들이 찢겨나간 채로,
이글거리는 불길이 글자들을 핥고 간 뒤에도
‘우리는 이렇게 존재해‘ 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연약한 온기는 기억으로 잦아들고
흩어지고 마침내 버려질 우리 인간보다 끈질긴..
나는 나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잃은 것도 없다. 여전히 이상한
행렬. 여인들의 옷, 이슬에 젖은 라일락, 계곡의 노래 소리.
거기, 책장에 책들은 있을 것이다, 가문 좋은,
사람에게서 온, 그리고 저 높은 곳, 눈부신 빛으로 태어난
-----------------------
책을 예찬하는 듯하지만, 실은 인간적 체험의 어떤 영원성을 찬미한다는 데에 이 시의 매력이 있다. 시를 읽다보면 책도 작가도 위대할 수 있지만 더 위대한 것은 작가가 기록한 인간의 지극히 보편적인 체험이란 것을 느낀다. 시인 체슬라브 밀로즈가 겪은 전쟁과 사랑과 꿈이 파노라마처럼 시에 흐른다. 한 개인의 기억을 떠나 세상의 낮고 또 높은 곳으로 번지는 이슬에 젖은 라일락 향기는 절망과 슬픔조차 흠 없이 빛나게 한다.
임혜신 <시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