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순에도 일하냐고? 돈벌어 꿈나무 키워야지”
지난 12월 29일 열린 제17회 설봉장학금 수여식에서 장학생들과 자리를 함께 한 유재두 회장 부부(가운데)
지난달 29일 제17회 설봉장학생 장학금 수여식이 열리는 뉴저지 포트리 더블트리 호텔, 작년한해 한인사회 경제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날만은 모여든 한인들 얼굴에 함박웃음이 서렸다. 미 동부지역 개인 운영 최대 규모 장학재단의 장학금 수상자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장내를 훤히 밝혔다. 이곳에서 설봉장학재단 유재두 회장을 만났다.
먼저 설봉장학재단의 이름이 궁금했다.
“설봉(雪峰)은 말 그대로 높은 산의 눈이다. 아무런 불순물이 없이 깨끗한 삶, 모든 사람들이 그런 맑고 순결한 인간으로 살자는 뜻이다. 그런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내 포부를 담아 장학재단 이름을 내 호인 설봉으로 했다.”
이 날 설봉장학재단(Ryu Family Foundation Inc)은 21명의 장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유재두(90) 회장은 직접 현장에 나와 수상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시간을 정복하라. 꿈을 실현하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며 “자신의 뜻에 치중하지 못했다면 반성하고 자신에게 반성문을 쓰라. 여러분이 훌륭한 재목으로 성장하기를 학수고대 한다”고 격려했다.
설봉장학재단은 미 동부 10개주에 있는 4년제 대학 또는 대학원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20여명의 장학생을 선발, 1인당 2,000~3,000달러를 수여해오고 있다. 지난 94년부터 선발되었던 장학생은 현재 400여명에 이르며 그동안 80만 달러가 수여되었다고 한다. 이 장학금을 받아 학자금에 보태거나 컴퓨터 등 공부에 필요한 기재를 사며 요긴하게 썼던 학생들은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현재 의사, 변호사, 예술인 등으로 훌륭하게 성장, 주류사회에서 자랑스런 2세로 활동하며 한인의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
현재 연말에 열리는 설봉장학금 수여식은 한인사회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로 성장했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지팡이를 짚고 걷지만 아직도 몸과 마음이 건강한 유회장은 요즘 근황을 묻자 “척추가 아파 걸음이 불편한 것 외에는 다 좋고 잘 지낸다” 며 “1주일내내 거의 사무실에 나간다. 일에 관한 한 100% 풀타임이다” 고 말한다.은퇴하지 않고 아직 일을 하냐고 하자 대뜸 “일 안하면 누가 돈 주나요?” 한다. 유회장의 패기와 열정이 나이를 잊게 만든다.
현재 유재두 회장과 가족이 37년째 운영 중인 프로라인(Pro Line)은 뉴저지주 웨인에 사무실을 갖고 낚시, 사냥, 요트 등 레저용 신발을 제조하는 중견업체이다. 미국 각 주에 매년 수백만 켤레의 신발제품을 판매하며 중국을 비롯 세계 각국에 진출하고 있다. 이민 와 비즈니스가 안정되자 유 회장이 가장 먼저 한 것이 장학재단 설립이다.
‘개인이 한인사회의 백년대계를 꿈꿀 수 있는 가장 좋은 투자가 인재양성’이란 유 회장의 뜻이 재단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키워왔다.처음 유 회장이 장학재단 설립의 뜻을 가족들에게 밝히자 평생을 내조 해 온 부인과 2남 4녀 가족을 대표해 장남이 재산포기 각서를 쓰면서 온 가족이 뜻을 함께 한 점이 놀랍다.개인 돈 200만 달러로 시작된 장학재단은 현재 ‘프로라인’ 수익금과 가족, 주위가 합세하여 적립금은 550만 달러로 늘어났으며 앞으로 1,000만 달러까지 기금을 늘릴 계획으로 날로 성장 중이다. 그의 큰 뜻에 한국정부는 1999년 대통령상, 2010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전달했다.
유회장은 설봉장학회 말고도 한영-영한 번역대회를 후원하고 있고 특히 2006년 설립된 한미헤리티지 재단 회장으로서 2008년 ‘한인이민 사적지’ 동부편을 발간하기도 했다.‘이민 선배들의 눈물과 이 서린 발자취를 되새기고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취지로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DC, 보스턴 등에 있는 한인이민역사 유적지 14곳을 소개한 책자다.
▲60세에 다시 시작
그렇다면 유회장은 언제 미국에 와서 비즈니스를 이렇게 일구었을까.
1922년 경북 영덕군에서 태어난 유회장은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우유배달을 하며 상업학교를 다녔다. 오사카에서는 레저용 신발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1949년 한국으로 귀국하여 오사카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신발제조업체인 조일공업사를 차렸다. 제품을 미국에 수출하게 되면서 조일공업사는 종업원 1,500여명을 거느린 한국 5대 신발제조업체로 성장하는 등 승승장구로 잘 나갔다. 하지만 73년 화재가 일어나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 유회장, 그러나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맨손으로 다시 시작한다’
70년대 중반 미국 이민을 왔는데 이 때 나이가 60세. 한국에서는 환갑으로 은퇴할 나이였다. 하지만 유회장에게는 ‘은퇴’란 단어는 없었다.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그는 새로 시작했다. 이 스토리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언제 들어도 장기간 불경기에 좌절하고 시름을 겪고 있는 한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준다. 유회장은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 앞에서 신발 도매상으로 제2의 도전을 시작했다. 조일공업사에서 미국에 제품을 수출할 때 인연을 맺은 미국 바이어 도움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
도매업을 통해 판매망을 어느 정도 갖춘 뒤, 레드라인이라는 레저용 신발 제조업체를 설립했고 중국 등에 거래공장을 세웠다.회사가 조금씩 커지면서 탑 라인, 현재의 프로라인으로 상호가 바뀌면서 규모도 더욱 커지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유회장은 평생의 염원으로 삼아왔던 일에 착수한 것이다. 공부는 잘하나 학비 마련이 어려운 한인 가정의 학생들을 보면서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곤궁했던 시절이 생각나 준비기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해야겠다는 결심을 실행시켰다.
유재두 회장은 말한다.
“내가 하는 일은 작다, 하지만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주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결실을 맺고 있다.유 패밀리 재단이라는 튼튼한 뿌리 아래 좋은 자양분을 듬뿍 흡수한 나무는 나날이 훌륭한 거
목으로 자라고 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며 한인사회 품을 떠나 미국내, 널리 세계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그의 첫 말이 다시금 기억난다. “가만히 있으면 누가 돈 주나요? 일 해야지요.” 구순에 들어선 유회장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여 번 돈이 우리 자식들의 꿈이 되고 있다.‘미래는 자라나는 2세 교육에 있다. 훗날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한인의 우수성을 알리는 큰 인물이 되어 달라’는 유 회장의 신념과 소망을 담은 푸른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한인사회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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