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아들을 애프터스쿨로 픽업하러 가면, 아들 녀석은 차에 타자마자 예외 없이 "오늘 저녁 뭐 먹어?"(What’s for dinner?)라고 묻는다. 어떤 때는 한창 자랄 나이라 그러려니 하다가도 피곤해 짜증이 날 때면 "엄마 얼굴 보면 먹을 것밖에 생각나지 않니?"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오늘 저녁 메뉴는?" 그 질문에 "그래 뭐, 뭐, 뭐다"라고 대답해준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점심때 직장인들이 뭘 먹을까, 식당 고민, 메뉴 고민을 하는 것은 아주 즐거운 고민에 속한다. 주부들이 저녁 준비에 앞서 갖는 식단 고민은 그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직접 만들어야 함은 물론 지금 냉장고 속에 있는 재료가 무엇인지, 어제 메뉴는 무엇이었는지, 이런 국을 끓였을 때 어울리는 반찬은 무엇인지, 시간은 얼마나 걸릴 지를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20년전 처음 이민 왔을 때 생각이 난다. 언니 집에 살고 있던 나는 저녁때 언니와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올 때마다 언니가 혼자말로 "오늘은 뭘 해먹지?"라고 탄식하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서는 가정부나 파출부가 온갖 집안일과 부엌일을 다 해주던 시절이라 나는 이민 오자마자 그렇지 않은 미국생활에 적잖이 실망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방금 ‘뭘 해먹지’ 하던 언니는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옷도 안 갈아입고 부엌으로 직행해 쌀을 씻어 앉혔다. 그리고는 김치찌개를 끓이면서 계란 몇 개를 휘휘 풀어 중탕을 하고, 불고기를 금방 쓱쓱 무쳐 볶거나 오븐에 생선을 넣어 굽곤 했다. 그동안 내가 하는 일이란 고작 김을 재어 굽고 식탁을 차리는 일, 상추를 씻는 일, 언니가 금방 해 낸 요리들을 나르고 물을 따라 놓는 일 등이었다. 곧 이어 형부와 조카들이 식탁에 모여 앉아 엄마의 즉석요리를 먹기 시작하는 시간은 불과 한시간도 안되었다.
그런 언니가 너무도 대단하고 훌륭해 보이면서도 나는 비슷한 형태로 닥쳐올 나의 운명에 대해 도리질을 하며 속으로 강한 거부 의사를 다지곤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 후 결혼과 함께 언니 집을 떠나온 나는 지금 꼭 언니처럼 살고 있다.
"오늘은 뭘 해먹지?" 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옷도 못 갈아입고 부엌에서 밥을 앉히고,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고기를 굽는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식탁이 완성되는 시간은 불과 40여분. 아마 지금 어떤 조카가 나와 함께 살면서 내가 식탁 차리는 모습을 보면 20년전 나와 꼭 같은 생각을 하며 속으로 도리질을 할 것이다.
시대와 환경을 초월해 주부들이 갖는 공통된 고민이 있다면 "오늘은 뭘 해 먹지?"일 것이다.
어떤 땐 답답해서 퇴근길에 남편에게 전화로 물어도 본다. 그래도 신통한 대답이 돌아온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저 ‘알아서 하지’ ‘당신 하는 건 다 맛있어’ ‘원겸이는 뭐래?’… 뭐 이런 정도니 내가 그에게 무슨 바랄 것이 있으랴. 그럴 때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자" 좀 이래주면 안되나?
남편들이 요리에 동참하지 않으면 최소한 의사라도 밝히거나 아이디어를 주는 것은 식사의 의무이자 예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확실한 의사가 은대구 조림이라든가, 새우 토마토 양념구이, 쇠고기 굴소스 볶음 등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별미가 아니어야 함은 당연하고.
오늘은 뭐해 먹을까, 푸드 섹션 2면에 게재되는 ‘금주의 식단’은 이러한 주부들의 데일리 고민에 조금이라도 아이디어를 주기 위해 만든 난이다. 주부들의 피드백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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