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교통도 수돗물도 끊겼지만 주민들은 질서정연하게 배급 기다려
▶ “피할길 없는 자연재해에 화내면 뭐하나…이야기 나누면 불안 줄어”

구마모토 공설운동장의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담벼락.
새벽에 규모 7.3의 강진과 그에 버금가는 여진들이 쉴새없이 몰아치고 간 일본 구마모토(熊本) 시는 16일 마치 '적(敵)만 없는 전쟁터' 같았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벼락같이 주어진 이재민 생활은 보급로가 위태로워진 병사들의 일상과 닮아있었다.
이날 새벽 강진 때 진도 '6' 이상으로 가장 흔들림이 강했던 구마모토 시 주오(中央)구의 공설운동장 콘크리트 담장은 흘러내리듯 무너져 있었고, 상점의 통유리 쇼 윈도우는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내진설계가 철저한 일본의 도시 중심가인 만큼 폭삭 주저앉은 건물은 찾을 수 없었지만 상부의 벽돌이 대거 바닥으로 떨어져내린 건물을 숱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벽돌이 우수수 떨어지던 순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다면 참사를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전면 벽돌이 대거 떨어져 내린 구마모토현청 근처 건물.
도로는 매우 한산했다. 구마모토를 오가는 철도와 시내의 노선버스, 노면 전차 등 대중교통은 여진 우려 속에 이날 일절 운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택시도 일부 콜택시 말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구마모토공항 역시 터미널 천장이 강진의 여파로 떨어지면서 수속을 진행할 수 없게 되자 이날 폐쇄했다.
식당과 편의점도 문을 연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구마모토현청 앞 패미리마트의 경우 '연중 24시간 영업'이라는 문구 바로 위에 '지진의 영향으로 당분간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손글씨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구마모토 현청앞 패밀리마트. 영업중단 문구가 ‘24시간 연중무휴’ 글귀 위에 있다.
사 먹을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는 터에 많은 가구에서 단수·단전에 가스 공급까지 중단됐기에 적지 않은 주민들은 '배급로'가 끊긴 채 비축해둔 비상식량으로 '지구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자가용을 '이동식 숙소'로 삼는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이불을 조수석에 구겨넣은 채 이곳저곳 다니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 집에서 여진 공포로 숨 죽이는 것보다 한결 안전하고 마음편하다는 듯 보였다.
자가용은 없고, 집은 바닥에 널부러진 물건들 때문에 발을 디딜 틈조차 없게된 주민들에게는 갈 곳이 피난소뿐이었다. 그러나 피난소는 집이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불안감 때문에 집을 나온 이재민들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수백명의 주민들은 피난장소로 지정돼 있지 않은 인근 구마모토현 청사 1층으로 몰려들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물을 구할 수 있고, 수세식 화장실도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모여드는 사람 수는 점점 늘어났다.
현청 1층에 모인 주민들은 종이 박스와 집에서 가져온 매트리스 등을 바닥에 깐 채 '장기전' 모드에 들어갔다.
고령자들은 잠을 자는 사람과 라디오 등으로 뉴스를 듣고 신문을 읽는 부류로 크게 나뉘었다. 주부들은 자녀를 챙기거나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많았다. 젊은이들은 상당수가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었고 애완견을 현청으로 데려온 이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구마모토 현청에 자리 잡은 고령자가 지진 소식이 실린 신문 호외를 읽고 있다.
피난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현청에서 만난 사람들은 절박한 의식주 문제에 봉착한 이들 치고는 대단히 차분했다.

구마모토 현청의 이재민들
오후 3시 30분께, 현청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날 처음으로 빵과 생수를 급식하자 주민들은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 자기 몫을 받아갔다. 줄을 섰음에도 빵이 떨어지면서 받지 못한 5∼6명 중 일부는 "앞에 선 사람들이 더 가져간 것 같다"며 다소 투덜댔지만 목소리를 높이거나 항의를 하지 않았다.
이들의 '차분함'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시간에 파악할 길은 없었지만 온갖 자연재해 속에 살아가면서 몸에 붙인 '체념의 지혜'와 공동체 의식은 엿볼 수 있었다.
현청에서 만난 한 50대 여성은 차분한 이재민들의 모습에 대해 "불안도 있지만 자연재해인데 화를 내도 방법이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한 뒤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하다보면 불안이 조금씩 줄어든다"고 말했다.
한 40대 전업주부는 "집에 혼자 있으면 불안하지만 이곳에 나와서 함께 있으면 덜하다"며 "자위대원들이 식료품과 물을 나르는 모습을 보면 좀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이재민들이 모인 곳 뒤에 있는 현청 별관 10층에는 구마모토현과 중앙정부, 자위대, 사회복지법인 등의 관계자들이 숨 고를 틈도 없이 일하는 재해 대책본부 상황실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바로 앞에는 기자들의 작업 공간이 있었다.
피해 상황, 해야할 일 등이 시간대별로 적혀 있는 화이트보드는 출입구 밖을 향하도록 세워 놓아 기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또 이날 오후 4시 열린 재해대책본부회의는 기자들이 들어와서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뭘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인도적 긴급 상황인 점도 있지만 신속하고 투명한 정보 공개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보였다.

구마모토현청 재해대책본부 상황실의 화이트보드.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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