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은 특이한 자리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를 초대 수장으로 무려 2,000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연연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동방정교가 떨어져 나간 1054년의 대분열 전까지 모든 기독교인의 ‘아버지’(영어로 교황을 뜻하는 ‘pope’는 아버지란 뜻이다)였고 1517년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짝에 박아 개신교 운동을 일으키기 전에는 서방 기독교의 유일 지도자였다.
교황은 또 종신직이다. 한번 선출되면 죽기 전까지는 물러나지 않는 것이 관례다. 마지막으로 자발적으로 교황 자리를 물러난 사람은 1415년의 그레고리 12세로 그의 사임은 중세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다.
그의 사임을 이해하려면 그보다 다시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의 왕 필립 4세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와 맞서던 교황 보니파스 8세가 죽고 그의 후임자 베네딕토 11세도 즉위 8개월 만에 죽자 프랑스인인 클레멘트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된다.
프랑스 왕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던 그는 아예 로마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1309년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청을 새로 마련한다. 그 후 67년 동안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집무를 보며 1377년에야 비로소 그레고리 11세가 로마로 돌아가 다시 로마 교황청 시대가 열린다. 이 67년의 기간을 ‘교황의 바빌론 유수’라 부른다.
정작 문제는 그 후에 생겼다. 그가 죽자 추기경들은 그의 후임으로 우르반 6세를 선출하는데 뽑자마자 교황과 추기경들 간에 내분이 일어나 추기경들은 현직 교황이 살아있는데 다시 새 교황을 뽑는다. 그가 클레멘트 7세로 그는 다시 아비뇽에 교황청을 차린다. 이 후 한 동안 서방에는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추기경들은 새 교황으로 알렉산더 5세를 선출한 후 두 교황의 사임을 촉구했으나 아무도 사임하지 않아 교황 수는 거꾸로 셋으로 늘어난다. 1414년이 되어서야 콘스탄스 종교회의를 통해 알렉산더 5세의 후임인 요한 23세의 사임을 받아내고 로마 교황 그레고리 12세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파문한 후 사임하면서 ‘3명의 교황’ 문제는 가까스로 해결을 보게 된다. 그레고리 12세의 후임으로는 마틴 5세가 선출됐다. 이쯤 되면 왜 교황청 정치가 크렘린 정치보다 복잡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레고리 12세가 사임한지 거의 600년 만에 다시 자발적으로 사임을 발표한 교황이 나왔다.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1일 건강을 이유로 이달 말 퇴위하겠다고 밝혔다. 85세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수긍이 가지만 지난 수년간 곳곳에서 터져 나온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추행 스캔들 등 악재에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전 세계 10억 인구를 가지고 있는 가톨릭은 위기를 맞고 있다. 동성애와 피임 등에 관해 다수 흐름과 역행하는 입장을 고집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가톨릭의 본산 유럽이 갈수록 공동화 돼 가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다섯 나라를 꼽아보면 브라질, 멕시코, 필리핀, 미국 순이고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이탈리아가 마지막으로 들어가 있다. 그나마 유럽 신자들은 영세 때와 결혼식, 장례식 때나 성당에 가는 ‘무늬만 신자’가 대부분이다. 세계 가톨릭 인구의 절반이 라틴 아메리카에 있고 유럽은 그 반에 불과하다.
가톨릭이 새로운 활기를 찾으려면 점점 인구가 주는 늙은 유럽 노인 대신 빠르게 인구가 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사제 중에서 새 지도자를 뽑는 것도 방법일 것 같다. 세계에서 가톨릭이 가장 많은 교구인 상파울루 대주교인 오딜로 셰러나 전 브라질리아 대주교인 조아오 브라즈 등이 차기 후보로 유력시되고 있다는데 과연 보수의 상징 가톨릭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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