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콘서트
어제는 세상이 끝장난다는 날이었다. 고대 마야부족의 만세달력이 2012년 12월21일까지만 있다는 게 근거였다.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해는 비추고, 새들은 노래하고, 내 심장은 뛴다.” 반세기전 스키터 데이비스의 히트송 ‘이 세상 끝’의 가사다. 서울에서도 공연한 그녀는 마야달력이 아닌, “그대가 굿바이라고 말하는 날이 세상 끝날”이라고 노래했다.
‘지구종말’ 전날 밤도 세상은 조용했다. 지구촌 어디에서도 폭동이나 집단자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광란을 벌였다는 말도 못 들었다.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두고 쇼핑몰을 누비거나 송년모임에 참석하느라 발걸음이 분주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숨가쁘게 달려온 한해를 차분하게 음악을 들으며 되새김질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원래 연말엔 크고작은 음악회가 많이 열린다. 올해도 시애틀일원에서 20여회의 유명 콘서트가 이미 열렸거나 열릴 예정이다. 시애틀심포니는 이번 주초 헨델의 메시야를 공연한데 이어 다음 주말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한다. 워싱턴대학 미니홀에서는 오늘저녁 하프의 명인인 브론 저니가 공연한다. 호수 위에서 연례 뱃놀이 연주회도 펼쳐진다.
규모가 크고 입장료가 비싼 연말 음악회가 꼭 좋은 건 아니다. 그런 음악회에선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가족적 분위기에 무료입장이면서도 연주수준이 꽤 높은 크리스마스 콘서트가 시애틀 북쪽 머킬티오에서 해마다 열린다. 특히 미국인 주민들을 위한 연주회인데도 출연자는 한인들 일색이다. 연주를 듣기도 전에 마음이 편하고 흐뭇해진다.
올해 18회째인 머킬티오 크리스마스 콘서트는 ‘지구종말’ 이브인 20일 저녁에 열렸다. 예년처럼 500여명의 청중이 공연장인 머킬티오 장로교회 본당을 꽉 메웠다. 한인보다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부분 평상복 차림이었고, 자녀를 동반한 부모들도 꽤 있었다. 영어로 진행되지만 근래 동포청중이 늘어나면서 장내 스크린에 한글자막이 뜨고 있다.
이 연주회는 아동문학가이자 어린이사역 전문 목회자였던 고 안성진목사가 1993년 ‘안씨 가족 음악회’로 시작했다. 이민의 땅에서 음으로 양으로 도움 받은 이웃 미국인들에게 자손들의 음악재능을 살려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서였다. 회를 거듭하면서 외부 음악가들이 동참했다. 안목사가 별세한 2002년 후부터 연주회에 안목사 추모 개념이 더해졌다.
올해 콘서트에도 안목사의 외손자 박관빈씨와 손녀 안진선양(둘다 바이올리니스트) 외에 오유석‧김웅천(바리톤), 정민희‧장선(피아노), 프레드 김(플룻), 줄리아 변(바이올린), 정다혜(첼로), 한인 체임버앙상블 합창단 등 동포 음악인들이 대거 출연했다. 레퍼토리도 기악독주와 캐롤합창을 비롯해 오페라 아리아, 이탈리아 가곡, 한국가요까지 구색을 갖췄다.
인디언말로 ‘근사한 야영장’이라는 뜻인 머킬티오는 전형적인 백인부촌이다. 인구 100명 중 75명이 백인이다. 한인을 포함한 전체 동양계는 고작 17%이다(10여년 전까지 0.25%였다). 주민들의 중간 가구수입이 8만3,569달러이고 중간 주택가격도 56만7,000달러나 된다. 이런 부자동네의 백인들이 돈이 없어서 무료음악회에 떼 지어 몰려오는 것은 아니다.
수준급 음악회에는 수준급 애호가들이 찾아온다. 이날 음악회 분위기도 여느 해처럼 진지하면서 뜨거웠다. 일부 청중은 기립박수도 보냈다. 주류사회에 꼭 한국 전통음악을 소개하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들은 귀에 설은 한국노래보다 귀에 익은 노래를 자기들보다 더 잘 부르는 한인들에게서 더 쉽게 동류의식을 느낄 수도 있다.
이날 머킬티오 장로교회의 마크 스미스 목사는 “크리스마스엔 노래가 필요하다”고 설교했다. 동감이다. 대마초와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요지경 속에 본국 대통령선거까지 끼어 정신없었던 올 연말엔 머킬티오 음악회가 특히 소중했다. 모차르트의 ‘작은 밤의 음악’(소야곡)처럼 안씨 가족음악회도 작지만 ‘세상 끝날’까지 사랑받는 음악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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