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하이츠 인터섹션 인근 언덕에 위치한 LA카운티 화장장-묘지에서 1,656명의 무연고자 유골을 집단 매장하는 의식이 거행되고 있다. 집단 장례식은 지난 5일 치러졌다.
지난 12월 5일 번잡한 보일하이츠 인터섹션 인근 언덕에 위치한 LA카운티 화장장-묘지에서 1,656명의 무연고자 유골을 집단 매장하는 아주 특별한 의식이 거행됐다. LA 카운티가 매년 마지막 달에 ‘집행’하는 연례 의식은 늘 그러했듯 올해에도 조촐하고, 조용하고, 신속하게 치러졌다. 돌보는 이 없이 홀로 눈감은 1,600명의 외로운 넋은 카운티 관게자들을 비롯, 20여명의 참석자들이 자켜보는 가운데 한 공간 속에서 뒤섞였다.
올해도 2~3년 보관했던 1,600여명 쓸쓸한 장례식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합창 속 잠들어
LA카운티가 관할하는 무연고자 묘역의 새로운 집단 유택에는 묘비 대신 이들이 시체공시소로 들어온 연도가 새겨진 가로 4인치, 세로 4인치의 조그마한 표지가 세워졌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곳엔 묻힌 자의 삶을 간추린 묘비명도, 묻은 자의 슬픔을 담은 기록도 없었다.
무연고자들의 주검은 화장을 거친 뒤 LA카운티 시신공시소에 2~3년간 ‘보관’된다. 보관기간이 끝날 때까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은 유골은 매년 12월 LA카운티 소유 묘역의 조그만 공동 매장지에 한데 묻히게 된다. 카운티-USC 메디칼 센터는 1896년 이후 매년 이 의식을 거행해 왔다.
올해에는 2009년 LA카운티 시신공시소에 들어온 무연고자 시신이 매장됐다. 따라서 공동 유택의 팻말에 새겨진 연도는 2009년으로 되어 있다.
의식이 거행된 12월5일은 아침 안개가 유난히 짙었다. 잔뜩 습기를 품은 아침 공기에 흔들리며 한 줄기 샐비어 향이 피어올랐다.
보일하이츠에 거주하는 리처드 버니가 외로운 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피운 향이다. 버니는 망자들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친구로부터 이런 의식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는 전날 밤 부리나케 약초를 구해 망자들에게 바칠 향을 만들었다. 그것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인간다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참석자들은 버니 외에 빈민급식소 자원봉사자들과 목사, 카운티 관계자 등 20여명이 전부였다.
올해에는 이례적으로 유족도 한 명 끼어 있었다. 이베트 곤잘레스(36)는 당일 새벽 집단 장례식에 관한 뉴스를 접한 후 한달음에 묘지로 달려왔다. 홈리스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2009년 10월2일 길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고통스러웠던 이승에서의 생활을 마감했다.
이베트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당시 이베트는 수감 중이었고, 교도소에서 풀려난 후에야 어머니가 타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이 세상에 남겨진 혈육이라곤 나와 남동생 밖에 없다”고 밝힌 이베트는 “그동안 어머니의 유골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례의식은 카운티-USC 메디칼 센터의 목사인 크리스 포넷이 주재했다. 그는 올해로 5년째 이 의식에 참여했다.
포넷 목사는 일반적인 장례식과 무연고자들의 매장의식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했다. 매년 1,000여명의 유골을 집단 매장하지만, 소개할 개인적 이력은 물론 추모할 이름조차 없다. 장지에 얼굴을 보이는 유족도 거의 없다.
의식은 포넷 목사의 간단한 추도사에 이어 이슬람과 유대교, 힌두교, 기독교의 전통적인 장례 예배가 한국어, 스페인어, 영어로 제공됐다.
인디언 원주민들의 전통의식에 따라 맨발의 여성이 북을 두드리며 주문을 외웠다. 요란한 북소리에 묘지를 둘러싼 울타리 바깥쪽을 지나는 버스와 열차의 소음이 잠시 가려졌다.
장례식은 “여호아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되는 시편 23편의 낭독으로 마무리됐다. 참석자들은 마지막으로 찬송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를 합창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검은 상복차림의 셀렌 산티아고와 드레스 바스케즈는 시종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들 역시 고인들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고 했다.
올해 처음 의식에 참여했다는 산티아고는 보일하이츠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10대 시절 묘비명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묘지를 거닐곤 했지만, 무연고자 묘역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현재 알함브라에 거주하는 산티아고는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이 분들이 대면했을 두려움과 외로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며 “분명 자신의 사후 장례식이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현재 LA카운티 검시소 웹사이트에 명단이 고시된 무연고자 시신은 5,369구에 달한다.
LA카운티 검시소 수석 수사관인 크레이그 하비는 “무연고 시신이 들어올 때마다 가족을 찾기 위해 철저한 신원확인 작업을 벌인다”며 “이를 위해 들어가는 경비가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가끔씩 집단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연고자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단 장례식이 끝나면 한데 뒤섞인 유골을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처럼 뒤늦게 나타난 유족들은 공동 무덤 주변에 조그만 추모의 표식을 남기곤 한다.
1966년도 무연고 사망자 무덤 표지 근처에는 다섯 제프리를 추모하는 작은 돌이 놓여 있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아들아’라는 이름 모를 아버지의 비통한 절규가 새겨져 있다.
1996년도 집단 묘에서 불과 1피트 떨어진 2000년도 매장지 근처에는 1947년 3월14일생인 토마스 본이라는 남성의 이름과 함께 ‘사랑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산 자의 다짐을 담은 팻말이 서 있고, 그 약속이 지켜지고 있다는 증거처럼 시든 꽃 한 송이가 팻말 옆에 놓여 있었다.
뒤늦게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5일 부랴부랴 집단 장례식에 참석한 이베트는 의식이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야 어머니가 영면에 들었다며 계속 울먹였다. 행려병자로 숨진 지 3년 만에 어머니는 비로소 한줌의 재로 땅에 묻혔다.
어머니의 유골이 LA카운티 시신공시소에 보관되어 있던 지난 3년간 이베트는 거리의 푸른 신호등을 볼 때마다 ‘엄마’를 떠올렸다고 털어놓았다.
“신호등과 똑같은 푸른색이었어요. 우리 엄마 눈은 그렇게 파랬어요.”
엄마를 닮은 듯 신호등처럼 푸른 이베트의 두 눈이 물기에 젖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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