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히스테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위 20위 안에 드는 대학에 들어가야 합니다.”
J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정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 랭킹을 내는 기관이 적어도 10군데가 있는데 어디서 정한 상위20위를 말하는 것인가요”라고 묻자,“그건 모르구요…”라며 눈길을 피했다. “그렇다면, 학교 영어시간에 <파리대왕>이란 책을 읽어 보았나요”라고 되묻자, “네. 수업시간에 토론도 했고 독후감도 써냈지만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참 대화를 나눈 후 알아낸 것은, J군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그곳에서 알아주고, 특히 학비를 대주겠다는 할아버지의 귀에 익은 대학 간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할아버지, 부모,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J군의 동기와 노력은 요즘 한창 대선주자로 나선 인물들의 그것보다 높다.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J군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그의 삶에 전혀 적용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교 영어 수업에서 필수로 읽는 소설 <파리대왕>은 개인과 그룹의 대립을 그린 작품이다. 청소년 25명을 태우고 핵전쟁의 위험을 피해 안전지역으로 날아가던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한다. 청소년들은 무인도에 상륙하여 구조를 기다리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 사이에 파벌이 생긴다. 구조를 받으려면 바닷가에 오두막을 지어야 한다는 랄프와 사냥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잭은 사사건건 충돌한다. 먹이를 찾아 나선 사이먼이 잭의 일당에게 살해되고, 괴물이 섬에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소년들은 잭의 그룹에 합류하지만, 랄프는 끝까지 혼자 버틴다.
개인과 그룹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나무와 산림의 차이와 같다. 나무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산림은 나무들이 모여 이루어진 추상적인 개념이다. 개인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실제 인물이지만 그룹은 그렇지 않다. 개인이 그룹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는 숫자를 근거로 한 논리다.
한 예로 특정 개인을 몰아 왕따 시킴으로 그룹이 얻는 것은 대다수라는 파워 그리고 위계서열에서 오는 쾌감이다. <파리대왕>은 바로 인간 그룹의 바닥에 깔린 야만성과 권력욕을 폭로하고 있다.
‘상위 랭킹과 귀에 익은 대학’이란 말은 대학 지원자와 부모는 물론 사회를 동화시키고, 그들의 신념과 행동까지 변화시키는 집단 히스테리를 낳았다. 그것이 J군으로 하여금 감정을 자극하는 의식 세계에 집중케 하고, 그의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영혼ㆍ사상ㆍ인격에 관해서는 소홀하게 만들었다. 무의식과 의식 세계 사이의 평형이 파괴되어 혼란 상태로 빠지는 것이 정신병이다. J군은 마치 동물원 우리에 갇힌 사자와 같다. 자유를 찾겠다면 철책을 부수고 뛰어넘겠지만, 우선 당장 사육사가 주는 먹이, 구경꾼의 환호, 그리고 철창 사이로 바깥세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함과 동시에 자포자기 해야 하는 사자와 다를 바 없다.
정신병과 철책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을까. 우선 초음파 검사를 통하여 그룹의 의식세계를 판독하고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 랭킹 암세포가 번지고 있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 그 다음, 학교에서 읽는 책을 단순히 독후감을 써서 학점 따내는 도구로 여길 것이 아니라, 책이 던지는 메시지와 자신의 현실ㆍ미래ㆍ가치 사이에 놓인 연결점을 찾아낸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과 영혼에 어떤 파문이 일어나는지를 주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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