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이민자 문제 발벗고 나서...커뮤니티 숨음 조력자
1986년 뉴욕한인변호사협회 창설때 사진. 앞줄 왼쪽부터 이동호, 김재현, 손창문, 조대영, 임병규, 김광호 변호사.
큰 그림으로 그려볼 때 이민 초기 한인들이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고 한인사회를 리드했던 전문가 그룹을 댄다면 변호사와 CPA, 의사그룹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변호사와 회계사, 의사, 이 3사를 잘 만나야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이들 그룹은 비교적 미국 정착 역사가 길고 언어와 지식이 풍부해 그들로 부터 생활정보도 얻을 수 있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들의 의견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여러 한인 커뮤니티에서 리더그룹으로서의 역할을 당담 했다고 볼 수 있다.
뉴욕한인사회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였다. 70년대 중반 한인사회가 팽창할 무렵 변호사로서 개업한 인사들은 손창문을 비롯해 좀 늦게 진출한 김재현, 김정원, 이동호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보다 훨씬 먼저 하와이 이민2세 남병학(케네스남)이 있었으나 그는 한국말이 서툴었고 1974년 하와이 주정부의 초청을 받아 고향인 빅아일랜드로 이주한 후였다. 그리고 예일대를 졸업한 잔 리가 있었지만 그는 뉴욕에서 프랙티스를 하지 않고 귀국해 미8군 변호사로 활동했다.
초기 이들 4명의 변호사들은 뉴욕 한인사회의 자산이었다. 커뮤니티에 문제가 생기면 발 벗고 나서는 봉사자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자영업에 뛰어든 동포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점포 리스를 비롯해 라이선스를 얻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고 때마침 미국진출 러시를 보였던 한국계 지상사와 은행들의 지사 설치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80년대에 들어와 보다 젊은 세대의 한인 변호사들이 출현했다. 한석종, 정진우, 홍성육, 민대기, 김광호 등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면서 10명 내외의 변호사들이 한인사회와 연관되어 활동했다. 이들은 경쟁보다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 게 특징이었다. 한달에 한번씩, 어떤 때는 1주일에 한번 정도 식당에 모여 정보를 교환했고 여름에는 가족동반 피크닉도 다녔다.
당시 포코노에 있던 손창문의 써머 하우스는 자주 이들의 주말 파티 장소가 됐다. 여럿이 몰려가 리빙룸에서 함께 뒹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6년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 뉴욕한인변호사협회였다. 초대회장에 가장 오래된 손창문이 추대되어 1년을 봉사하고 이동호에게 바통을 넘겨줬다. 당시 한인 변호사들은 주로 커머셜과 이민문제로 바빴다. 비즈니스를 오픈하는 경우와 영주권
신청이 가장 많았다. 가끔 한인회 등을 통해 들어오는 딱한 경우의 동포들을 무료변론으로 도와주는 일 외에 통역, 인생문제, 정부쪽과 문제가 생길 경우 전화를 해주고 단체가 생길 때마다 고문 변호사로서 무료봉사를 해주는 일이 많았다. 협회 차원에서 1년에 한두 차례 무료 법률상담도 실시했다.
손변호사는 그때 여성 봉사자로 활동하던 염진호의 여성회, 가정문제연구소의 단체 활동을 열심히 도왔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케이스는 모두 무료로 변론했다. 이 무렵 김형수 피살사건이 발생했다. 1978년 12월 퀸즈 아파트 1층 비상구에서 동포(김형수)가 괴한의 칼에 찔려 피살된 사건이었다. 이로인해 하루아침에 4남매와 함께 생계가 막연해진 부인이 건물주를 상대로 입주자 보호 미비로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한 결과 보험사로부터 보상금이 지급됐다. 다행이었지만 담당 변호사가 보험금의 상당부분을 갈취한 것이 문제가 되어 당시 한인여성회(회장 염진호)가 미망인을 대신해 샌즈 변호사를 고소한 사건이었다.
시간이 좀 걸린 소송에서 샌즈 변호사가 패소해 자격 박탈된 것은 물론 그가 관계된 비즈니스로 인해 판사의 호된 꾸짖음을 당한 케이스였다. 손변호사의 기억에 남는 사건이었다. 그는 어디서나 남 앞에 서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봉사를 하면서도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고 남모르게 뒤에서 돕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단체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고 한인사회에서 변호사협회장이 그의 유일한 감투였다. 그래서인지 커뮤니티 활동과 관련된 그의 사진을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의 한국 경력은 아주 단순했다. 경기고 2학년때 서울법대에 입학할 정도의 수재였고 공군사병으로 제대하면서 국민의무는 마친 셈이었다. 1961년 5월 유학생으로 뉴욕에 도착한 그는 컬럼비아대학원에서 비교법으로 석사과정을 밟았다.
훠널드 홀, 잔제이 도미토리에서 공부하면서 박사과정은 로스쿨과 정치학의 조인트 프로그램을 택했다. 코스웍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뉴욕시립대 헌터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병행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다. 헌터칼리지에서는 미국헌법과 에이시언 거번먼트(중국, 일본 등 각국정부론) 강의를 하며 197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당시 뉴욕의 유학생 커뮤니티에서는 백선기를 중심으로 63학회라는 소셜 사이언스 그룹이 태동해 활동하고 있었다. 김영근, 노재봉, 홍원탁, 김경원, 차일석, 강석원 등이 토론에 참여한 기억나는 멤버들이었다.
그가 학업에 열중했던 61년부터 70년까지 한인커뮤니티는 별로 크지도 않았고 단체활동도 미약한 상태였다. 197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그는 잠시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의 변호사 사무실 두 군데로부터 초대를 받았지만 뉴욕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헌터칼리지에 사표를 내고 맨하탄 5애비뉴 44가에 개업했다. 2년전 은퇴했으니까 36년간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만 한 셈이다. 요즘 그의 일과는 아침에 일어나 뉴욕타임스, 월스트릿 저널을 정독하고 오후에는 산보와 헬스클럽에 가서 수영을 한다. 수영을 할 정도면 건강한 편이지만 하루 30분 이상은 하지 않는다.
저녁에는 부부동반으로 연극이나 음악회에 간다. 주말에는 뉴저지 포인트 플레젠트 비치에 마련한 위크엔드 콘도미늄을 즐긴다. 목요일 저녁 출발해 일요일 밤까지 사흘을 보내고 돌아온다. 5애비뉴 39가에 살고 있으므로 완전한 뉴요커이다. 가족은 부인과 아들, 딸 4식구. 딸 올리비아는 인터넷 웹사이트 관련 일을 하고 있고 아들 데이빗은 컬럼비아대 MBA를 이번 학기로 끝낸다. 부인 임정빈은 파터리 메이커. 맨하탄 11 애비뉴 스튜디오를 활용하면서 도자기 예술가로서의 열정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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