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나가던 월가 그만두고 사회봉사로 제2인생
평소 ‘엑설런트(excellent)’란 단어를 좋아해 자신의 삶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최경희 이사
한인환자들이 미국의사에게 자신의 증상을 세세히 설명하려면 어려움이 있다. 이 모든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준 뉴저지 홀리네임 병원 코리안 메디칼 프로그램 최경희 디렉터, 그는 25년간 잘나가던 월가 생활을 정리하고 사회봉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를 만나본다.
▲제2의 인생을 살게한 9.11
“낮에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저녁이나 주말에는 의사 면담이나 여의사들 네트워킹장을 만들어 주니 24시간 7일내내 일하는 셈이다.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을 하다 보니 엔돌핀이 나와 지치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는다”올해로 출범 4주년을 맞은 홀리네임(Holy Name Medical Center) 병원 3층에 있는 코리안 메디
칼 프로그램 센터에서 만난 최경희 디렉터(58)는 씩씩하게, 자랑스럽게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매년 한인이용자가 30%씩 늘고 있고 봉사하겠다며 들어오는 한인 2세 의사도 많아 현재 80명의 각 분야 의사들이 있다. 올해에는 유방암 바로 알리기, B형간염 바로 알리기, 당뇨병 예방 등 기존의 캠페인을 확대실시하면서 정신건강 분야에 보다 집중하겠다” 지난 한해 티넥 메인 오피스와 버겐카운티 클로스터, 잉글우드클립스 분원의 코리안 메디칼 프로그램 이용자 3만명이상이었다.
원래 최경희는 JP 모건에서 25년간 일하면서 리스크 관리부서, 부서장을 거쳐 한인 최초로 월가 본부장(Managing Director)이 된 여장부이다. 주류사회에서 탄탄대로로 잘 나가며 돈도 엄청 벌던 그가 한인사회로 들어온 계기는 무엇일까.“2001년 9월 11일, 월가 60번지 JP 모건 체이스 은행 25층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일하는데 비행기 한 대가 바로 창문 옆으로 지나갔다. 손을 내밀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비행기가 지나가자마자 쾅 소리가 나고 갑자기 끝에 불이 탄 종이쪽지가 마구 날렸다. 조금후 다른 비행기가 또 유리창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CNN TV 뉴스를 보고서야 상황판단이 됐다. 순간 한국에서의 방공훈련이 생각났다. 200명 직원들에게 무조건 집으로 가라고 했다. 25층 계단을 직원들과 함께 걸어 내려와 A선 지하철을 탔는데 그것이 월드 트레이드 센터 밑을 지나간 마지막 지하철이었다”소름끼치는 테러 현장을 눈앞에서 본 최경희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이제는 할만큼 했다. 미국사회에서 받은 것 돌려주자, 우리 동포들을 돕자”고 결심, 다음해 회사를 조기은퇴했다.
“평소 JP 모건사 동료 대부분이 주말이면 청소년 상담원, 홈레스 돌보기 등 커뮤니티 봉사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베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FGS 보드 멤버가 되고 뉴저지주 해링턴팍 교육위원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뉴저지 북부 웨스트우드 패스캑밸리 병원 이사가 되었다. 15명의 이사회에 합류하여 2003년 코리안 메디칼 프로그램을 출범시켰다.
“미국 병원에서 말이 안통해 제대로 치료를 못받는 한인들을 위해 접수, 진찰, 치료, 통역, 교통 서비스도 마련했다. 2007년 12월에는 한인의사가 50명이 되었다”그런데 코리안메디칼 프로그램은 날로 성장하는데 패스캑밸리 병원은 무리한 확장으로 인해 2007년 문을 닫고 말았다.“살면서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갔는데 갑자기 병원이 문을 닫자 정말 힘들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혈압이 마구 올라가 이때부터 먹기 시작한 혈압약을 지금도 먹고 있다”
최경희는 근처 지역의 병원 경영진을 방문, 그동안 해온 코리안 메디칼 프로그램을 금융전문가로서 분석한 자료를 보여주며 홍보한 지 얼마후 한 병원을 결정했다. ‘한인이 와서 대우받는 병원, 경영진 마음이 따뜻하게 오픈된 병원’이 홀리네임 병원이다.1925년 설립된 대형종합 의료기관으로 외과수술, 신장투석, 응급의료센터, 분만실, 뇌졸중 전문센터 등이 있고 특히 심장 및 암 치료에 있어 미 전국에서 인정받는 의료센터이다.
▲항상 더 배워야했다
월가의 금융전문가에서 코리안 메디칼 프로그램 디렉터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최경희, 그는 1953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군청 공무원이던 아버지, 이웃에 베풀기를 즐기는 큰손 어머니는 평소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사고를 지닌 분이었다. 어머니는 6명의 자녀 중 안경희(결혼 전 성)와 남동생을 불러서는 ‘서울에 올라가서 공부해라, 너희들이 잘 하면 모든 식구들이 서울에 간다’는 막중한 사명감을 심어주었다.
어려서부터 독립심 강하고 똘똘한 딸의 됨됨이를 알아본 어머니에 의해 서울로 올라간 남매, 최경희는 서울여상에 들어갔고 중학생인 남동생 밥을 해주며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졸업후에는 섬유회사 경리과에 취직했고 밤에는 명지대 영문과에서 공부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영어 개인교육도 받았다. 용산 미 메릴랜드주립대 분교에서 공부하면서 남편감을 만나기도 했다. 대학졸업후인 1978년에는 JP모건 한국지점에 입사하여 3년간 일했다.
“남편이 결혼과 동시에 미국 유학을 가려했다. 그래서 본사에서 일해달라고 한 요청이 받아들여져 81년 뉴욕에 왔다. 남편도 월가 보험회사에서 일해 뉴저지 집에서 월가까지 출퇴근을 함께 했다”뉴욕 JP모건 입사당시 1만5,000명 직원 중 유일한 아시안으로 3년만에 15개국 해외지점 경리담당 총책임자로 임명되고 본부장이 되기까지 어떻게 일하고 슬하의 두 딸은 어떻게 키웠을까?
“처음엔 남미, 아시안 지점 책임자로 일하면서 해외출장도 많이 갔다. 영어를 뛰어나게 잘하지도, 좋은 학교를 나오지도, 미국사람을 많이 알지도 못하는 동양인 여자가 인정받으려면 일찍 오고 늦게 가야 했다. 남들 8시간 일할 때 12~14시간 일하다보니 보스 눈에 들었다. 틈틈이 비서에게 영어 농담도 배우며 뭐든지 열심히 했다”실시간 모니터 정보를 확인하며 전세계 거래망을 통해 5%의 예상치 못한 리스크를 추측, 모든 상품의 거래가 라인 리밋을 정해주는 일은 치밀한 머리와 결단력, 추진력이 있어야 했다.
“어머니와 일하는 아주머니가 집안일과 육아를 도와줬다. 32년 결혼생활동안 남편의 외조도 너무 많이 받아 앞으로 사는 날까지 계속 갚아야한다”특히 96년부터 98년까지 싱가폴 지점장으로 근무할 당시 남편 최재섭씨는 잠시 직장까지 접고 싱가폴에서 함께 생활하며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그렇게 ‘회사에 가면 집 잊어버리고 집에 가면 회사 일 잊고’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지금도 서울의 친정어머니는 은퇴하지 말고 계속 일하라고 한다”는 최경희. 당신의 선택으로 딸은 서울에 갔고 온 집안의 꿈을 이뤘으니 ‘똑순이’ 딸의 커리어를 무엇보다 존중한다고.
“어느 분야든 기본적인 기술이 3분의 1, 다른사람과의 관계를 잘하는 긍정적인 마음이 3분의 1, 나머지 3분의 1은 기회가 올 때 잡아야 한다, 이 3분법 원칙을 잘 따르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최경희는 10년 주기로 자신의 삶이 눈앞에 보였다고 한다. 아직 50대를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 중이지만 60대의 모습으로 ‘코리안 메디칼 프로그램이 더 커지고 미국 병원마다 한국 의료프로그램이 마련되면 여러모로 도와주고 싶다’는 바람이 신선하고 원대하다.그에게 정말이지 출퇴근은 없는 것같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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