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선 <전 커네티컷 한인회장>
해마다 연말에는 가족여행을 한다. 한해를 돌아보고 다음 해를 맞고자 하는 처음의 의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고 어느덧 10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 사이 아이들도 자라 자기 일상이 더 중요한 나이가 되었지만 함께하는 가족여행을 늘 기다린다.
지난해에는 아내의 제안에 따라 카리브해의 낯선 섬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아이들은 출발 전날 밤이 되어서야 무거운 책과 옷을 싣고 집으로 들어섰다. 아내는 단거리 선수처럼 온 집을 뛰어다니며 아이들 저녁은 물론 집을 비우는 동안 해 두어야 하는 일, 여행가방을 챙기는 일까지 익숙한 손놀림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 설레임 그리고 다가올 휴식이 그 많은 수고를 가름하리라 믿었다. 나는 나를 내려놓고 가기로 생각하며 애써 모르는척 비켜섰다.
항공사 사정으로 비행 스케줄이 변경되어 작은 섬에서 갈아탄 비행기는 반쯤 빈 좌석으로 인해 좌석 배정과는 상관없이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앞뒤로 균형을 맞추어 앉아야 이륙할 수 있는 소형 비행기였다. 불안한 마음은 다른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더디고 느리게 움직이던 동체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늘로 떠오르자 누구랄 것도 없이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낮선 사람들과도 이렇게 쉽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또 다른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지상을 떠난 비행기는 높지 않은 상공에서 우리를 또다른 신세계로 안내했다. 가끔은 기류를 만나 덜컹거리며 구름 속을 가르기도 하고, 또 파도의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바다가 선명히 보이는 낮은 비행으로, 그렇게 40여 분을 날아 드디어 도착한 목적지였다.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욕심껏 가방 반쯤 채워 들고 온 여행이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 내가 참 먼 길을 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길이 옳았는지, 시간을 되돌려 그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을 다시 선택할 수 있었을지, 끝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려 엉키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므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회한이었을까.
한참동안 읽던 책을 앞에 두고 끝모를 생각에서 벗어나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내 눈은 인쇄된 활자에서 전하는 부음을 들었다. 오정희님의 글에서 이미 10년 전에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참담한 경험을 한 것이다. 선생님은 석사 학위 논문 지도교수셨다. 그 즈음 정년을 앞두고 계셨는데 수줍은 소년의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은사님이시다. 선생님의 강의는 강의실 대신 선생님댁 서너평 짜리 사랑방에서 진행되었는데, 시학 강의 대부분은 선생님의 시를 두고 그 시에 대한 배경과 심회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2부는 사랑채에서 나와 돈암동 시장골목의 허술한 막걸리 집에서 진행되었다. 판소리를 전공한 학형은 남도 소리를 했고 가난한 시인이 되고자 했던 학형은 너댓편의 시를 암송하곤 했었다. 그도저도 아니면 문단의 이러저러한 이야기며, 그도 또 시들해 지면 늘 마지막에는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로 이어졌다. 정년에 임박한 선생님의 첫사랑은 거의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진행형으로 지속되곤 했었다. 선생님의 댁으로 돌아가는 길목, 선생님의 댁이 멀리서나마 셈해 볼 수 있는 골목길 끝에서면, 선생님은 우리 모두를 불러 모으고서는 담벼락에 실례를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남의 오줌 누는 것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A학점을 원하는냐. 너희가 나를 교수로 부르느냐 ‘ 선생님의 어린아이같은 행동에 우리는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너나할 것 없이 담벼락에 서서 바지춤을 내렸었다. 그날의 시학 강론은 그렇게 막을 내리곤 했었다.오래된 실타래가 천천히 풀리듯, 엊그제 같이 생생한 기억속의 심연에서 빠져나오고 보니 다시 나를 만났다. 이민 생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학교 주변에만 살아오신 선생님과 내가 너무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까닭일까. 선생님의 첫사랑은 선생님이 가지 않은 길이라 그리 오랫동안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시학강의의 마지막 주제가 되었던 것이었을까.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인지, 내가 살아온 길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요즘들어 졸업을 하고도 직장을 얻지 못해 좌절하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만난다. 그들의 꺾인 꿈이 혹시라도 먼 훗날 가지 않아 회한으로 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