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인간 평등의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노약자든 청년이든 모든 인간의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며 따라서 이들이 갖는 정치적 권리도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평등하다는 생각이 모든 인간의 능력이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좋은 사람, 부지런한 사람, 정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한 표를 주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산술적으로 구분해 누구는 몇 표, 또 누구는 몇 표를 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단력과 경험, 지식이 같지 않은 사람들이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데서 오는 부작용도 있다. 달변으로 모든 국민에게 금송아지를 한 마리씩 주겠다는 선동가가 나타나면 이에 혹해 그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히틀러다. 1923년 11월 9일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해 감옥살이를 한 그는 풀려난 후 대중을 혹하게 하는 광기 어린 연설로 합법적으로 다수당이 된 후 1933년 집권에 성공한다. 그 후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가는 익히 아는 바다.
다수가 잘못을 범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 아니다. 서구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칭송 받고 있는 아테네 최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다수결에 의한 배심원 재판에서 합법적인 사형 언도를 받고 처형됐다.
화이트헤드는 “모든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한 주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국가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자신이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존경하던 소크라테스가 ‘민주적으로’ 살해되는 것을 목격한 플라톤은 평생 민주주의에 대한 적의를 삭이지 못했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거의 모든 이슈에 대해 스승 플라톤과 대립각을 세운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여러 국가 형태 중 민주주의가 타락한 중우정치야말로 최악의 정치 체제로 봤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그는 반 마케도니아 파가 득세하면서 자신을 재판정에 세우려 하자 “아테네인들이 철학자에게 두 번 죄를 짓게 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명언을 남기고 도주했다.
서구를 대표하는 두 철학자 이래 민주주의가 지닌 문제점에 대한 성찰은 서양 철학 주요 관심사의 하나였다. 이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지금 세계의 보편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처칠 말 맞다나 그것이 “다른 모든 제도를 제외하고는 최악의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어떤 제도도 민주주의만 못하다는 것을 인류는 오랜 경험과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판단력이 미숙한 국민이 분위기에 휩쓸려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상존한다. 만인 평등을 내세우는 모든 민주주의 국가가 참정권에 연령 제한을 두는 것은 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갓난아이나 코흘리개가 국가 대사를 결정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미국 쇠고기 수입을 막기 위한 촛불 집회가 한창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 참석하는 사람의 70~80%가 중고생이라는 점이다. 심지어는 “어른들이 광우병의 위험성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일깨워주기 위해 나왔다”는 초등학생까지 있다. 이를 보고 한국의 정치인, 각종 단체장, 사회 지도층은 “좀 더 공부를 하고 나오라”고 타이르기는커녕 중고생들 말을 듣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이 법석을 떨고 있다.
투표 권한조차 없는 아이들이 “명박아, 미친 쇠고기 너나 먹어라”는 피켓을 들고 설쳐대고 어른들이 이를 부추기는 사회는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사회다. 중우정치보다 무서운 미성년 정치가 판을 치는 한국, 언제나 정신을 차릴 것인가.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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