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1일은 미국인에게만 비극의 날이 아니다.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칠레 군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첫 마르크시스트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쿠데타로 뒤집었다. 공군기가 모네다 대통령 궁을 폭격하고 체포가 임박해지자 아옌데는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혈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그 후 17년간 최고 권력자로 남아 있으면서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폈다. 그가 물러난 후 구성된 진상 조사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3,000명의 시민과 저항 인사가 그에 의해 살해됐으며 3만 명이 고문당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워싱턴과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외국에서도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감행, 무참히 살해했다. 운동 경기장에 정치범을 가둬두고 무자비하게 살해한 사건은 영화 ‘미싱’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쿠데타 이전까지 칠레는 중남미에서는 드물게 민주주의와 군의 정치 불개입 전통이 확립된 나라였다. 문화적으로도 1945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20세기 최대 시인의 하나며1971년 역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파블로 네루다도 칠레 사람이다. 일부에서는 국민 의식 수준이 높고 민주 전통이 강했던 것이 오히려 군부의 야만적인 탄압을 불가피하게 했다는 분석도 있다.
피노체트는 정치적으로는 가혹한 독재를 했지만 파탄 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친 시장주의적 정책을 폈다. 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불과 보름 전 타계한 밀튼 프리드먼이다. 그와 그가 적을 둔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소위 ‘시카고 보이즈’)은 인플레를 잡고 칠레 경제를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놨다. 지금도 칠레는 경제적으로 중남미에서 가장 견실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랫동안 칠레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던 피노체트지만 끝은 행복하지 못했다. 1988년 자신이 닦아 놓은 경제적 업적을 바탕으로 자신의 재신임을 묻는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패하고 1990년 민선 대통령에게 실권을 넘겨줬다. 1998년에는 신병 치료차 영국에 갔다 스페인 판사로부터 집권 중 스페인 시민 살해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는 바람에 2년 가까이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결국 건강 악화를 이유로 풀려나 간신히 고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후 칠레 대법원은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면책특권을 박탈했으며 정부 조사 결과 그가 수천만 달러에서 1억 달러가 넘는 비자금을 해외 비밀 구좌를 통해 관리해 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지지자들조차 등을 돌리기 시작, 외로운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런 피노체트가 10일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칠레는 축배를 드는 사람과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로 극명하게 갈라졌다 한다. 그의 죽음을 축하하는 사람은 그를 “민주주의 뒤엎은 살인마”로, 애도하는 사람은 “칠레를 혼란과 파멸에서 구한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옌데 정부가 무너진 것은 피노체트 탓만은 아니다. 36%의 유효 표로 당선된 그는 반대파를 탄압했으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부유층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강압 정치를 폈다. 강제로 물가를 내리고 임금은 올리는 등 경제의 기본을 무시하는 정책을 펴 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널리 퍼졌고 피노체트는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미국의 지원 하에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일을 꾸민 것이다.
많은 역사적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다. 한 사람이 경제도 살리고 인권도 존중했으면 좋으련만 히틀러, 스탈린에서 박정희,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수두룩하다. 피노체트도 박정희처럼 “나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란 말을 죽기 전까지 했다 한다. 과연 역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인권은 짓밟았지만 경제는 살린 인물”보다는 “경제는 살렸지만 인권은 짓밟은 인물”로 기록돼야 하지 않을까.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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