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끈한 낮 기온이 피부에 따갑다. ‘여름의 시작’이라는 일력에 어울리게 거리에 보이는 노출면이 많아진 옷차림새가 나른한 공기 속에 산뜻 하다. 살갗을 찌르는 듯한 햇빛의 열기도 그늘 안에선 상쾌히 가셔지는 이곳 더위다. 한해의 가운데로 접어드는 이달은 보편적으로 결혼식이 많고 각 학교의 졸업과 방학이 시작되며, 한여름의 휴가철을 준비하는 바쁜 시기이다.
그런데 일주일 사이 다섯번이나 지진이 발생해서, 지각의 심상치 않은 변동에 적잖은 신경이 쓰인다. 석연찮은 국제 관계 속에서 6.15 남북 공동 선언 5주년 행사도 평양에서 열렸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된 6.25 사변 발생 55주년이 되는 달이기도 하다.
예고 없는 전란으로, 평온한 일상의 모든 질서가 하루사이에 허물어졌던 당시의 처절한 아픔은, 그 세월의 흐름만큼 희석되며 잊혀져가고 있다. 무자비한 생명의 위협을 목도하며 불안과 공포를 피해 이동하는 긴 대열에 허무하게 휩쓸려야했던 반세기 넘은 지난날이 되살아나는 오늘이다.
그날 어수선한 인파사이로 먼지를 뒤집어쓴 탱크가 선발대로 나타났으며, 세뇌 받은 훈련으로 굳어진 표정의 총 든 병사가 천천히 진입하는 전차 속에 박혀있었다. 진흙으로 빚어진 마네킹 같은 부동의 자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명감을 대변하고 있었는데 소년처럼 애티 나는 인민군이었다. 그후 노동자가 아니면 부르조아로 불리고, 고등 학생의 신분도 지식계급으로 분류되는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며 내무서(?)에 걸린 낯선 깃발조차 섬뜩한 시기가 되어갔다.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동원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도발적인 가사의 적군가를 따라 북쪽으로 끌려갔다. 건전지 공장에서 임시직으로 명맥을 유지했던 친척도 급작스런 소집령으로 직원들과 함께 실려갔는데, 비행기 폭격의 틈새로 탈출한 요행의 생존자가 되어 아찔했던 갈림길의 그 순간을 회고했다 .
아군과 적군, 승리와 패배, 생존과 죽음의 완전한 이분법만 허용되는 상황에서, 인간적이란 바램은 차라리 사치였다. 더욱이 그 긴박함에 서 가장 슬펐던 것은, 잔인한 혈전의 현장이 같은 얼굴 같은 말을 하는 한 핏줄끼리의 대치라는 사실이었다. 내 힘으로 나라를 건지지 못한 약세였기에 받은 큰 도움이, 상반된 이념의 국토로 분단하면서 비극의 원인제공이 된 셈이다.
순간적으로 당한 물리적 피해로 인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운명으로 바뀐 수많은 삶의 파편들. 잊혀지지 않는 악몽으로 각인된 과거의 혼란은 겪은 자만의 불행이 아니다. 언제이고 재발할 수 있는 불씨를 감추고 있는 ‘북’의 현 정세이다. 더위와 강풍을 통한 옷 벗기기의 이솝우화가, 긴 세월 동안 적용되고 있으나 아직도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미로에 있다. 또한 평화 수호라는 명분으로 곳곳에서 희생되는 생명의 통곡이 지구를 오염시키는 가운데, 6자회담 성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오늘이다.
이제 한국은 반 백년의 노력으로 인해 가슴아픈 파괴의 현장이 눈부시게 재건되었고, 수혜 대상이었던 어려움에서 시혜국으로 향상된 경제의 조국이다. 줄기세포 배양의 성공이나 전자반도체의 세계진출하며 선진국과의 과학두뇌 경합에서도 어깨를 겨루는 자랑스런 나라가 되었다. 이 모두가 더 나은 내 일을 위해 분투하는 국민들의 뜨거운 열성의 결실이 아니겠는가.
장마가 시작되는 하순에 출산하여 땀띠로 고생했던 내 아들의 생일이 있는 달이기도 한 6월. 올 여름도 고국의 대책 없는 장마 피해를 의연금으로 달래는 답답한 사연이 발생치 않기를 바라는 노파심은 나이 탓일까. 토끼모양의 우리국토가 타의로 묶인 녹슨 허리띠를 풀고, 남남북녀의 고사를 더듬으며 찬란한 민족의 역사를 엮어볼 날은 언제 올 것인가. 안개 속을 헤매며 빛을 그리는 긴장의 아픔을 삭이며 그 날을 위해 우리 최선을 다해야겠다 .
이인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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