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가 그리운 겨울철엔 베란다 난간에서 슬쩍 인사만 하던 햇빛이, 오후가 되면 거실을 가로질러 식탁 위를 넘나드는 요즘이다. 때문에 블라인드를 엇비슷이 조절하면서 서향 가옥의 뒤늦은 빛의 침투를 견제하게 된다. 오늘도 흰 벽에 반사되는 눈부심을 비끼다가 문득 주홍색 꽃이 무리진 화려한 풀밭이 싱그럽게 펼쳐 있는 그림의 달력을 보게 됐다.
붉은 숫자로 인쇄된 여섯 개의 공휴일이 느긋하고 파란 꽃무늬로 덧그린 동생과 조카의 생일날이 반갑게 눈에 든다. 월례 모임과 정규 행사도 다른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작은 글씨로 드문드문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머니날, 스승의 날, 석가 탄일, 성년의 날, 민주화 운동 기념일, 발명의 날, 메모리얼 데이, 바다의 날 등으로 찍혀 있다.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려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날을 만들어, 그 하루만이라도 정한 뜻을 일깨우려 하는데, 그 중에도 인성의 기본에 집중하게 하는 어린이, 어머니, 스승의 날이 모인 5월은 따뜻한 분위기가 겹치기에 가정의 달로 통칭된다.
퇴색하지 않는 사랑의 상징인 어머니날은 크고 작은 부분적 행사로 베풀어졌고, 사은을 표현하는 스승의 날도 조촐하게 기리었다. 허나 민주화 운동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 있어 마음을 추스르기 어렵다 .
오래 전에 스승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을 묻는 TV 대담 프로를 무심히 스치면서 ‘지식의 전달자’로 여긴다는 여학생의 거침없는 답변에 아연 실색한 일이 있었다. 언행 하나부터 전 인격을 존경하며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던 우리의 ‘스승의 상’ 을 차갑게 평가 절하하는 당돌함이었다 .
불편을 참으며 모범적인 생활인이어야 했던 교사직의 상징성이 희석된 현실인가.
부모에게서 버림받아 힘들게 성장한 젊은이가 어버이날을 거부한 경우가 있었다. 생리의 본능만으로 잉태된 생명은 존재의 가치조차 없다는 냉혹한 논리로 자신을 비하했고, 인정을 기피하며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무모함으로 마음 문을 닫고 있었다. 자식 위해 희생하는 본연의 부모 사랑을 접하지 못한 그의 불행을 어떻게 위로할지 난감했었다 .
정의 구현이나 사회 정화를 위한 대의 명분으로 옳고 그름이 명확히 구분되는 명제가 아닐 때, 우리의 판단 기준이 헷갈리기도 한다. 감성이 배제된 이성으로 분석한 주제가 하자 없는 결론으로 사실화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유대가 어떤 규격으로 짜여진 물건일 수 없기에 환경에 의한 다양한 사고와 판단을 수용하며 교정하는 융통성의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곳에서 낳고 자란 어떤 분의 따님이 한국에 나갔을 때 버스를 탔는데, 힘센 남자들이 무리를 밀치며 차에 오르더라며 “어떻게 여자를 제치고” 먼저 탑승할 수 있는가 실망했던 모양이다. 노약자 우선 순위의 생활에 익숙한 그녀에겐 상상조차 못할 무례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로 이해시킬 문제일까 생각해 본다.
“인간은 지어져 가는 동물이다”라고 파스칼은 말했다. 살면서 쌓아 온 양식과 향상을 추구하는 부단한 노력에 따라, 그에 걸맞은 모습으로 빚어지는 인격체인 우리이다. 제 각각의 특성과 능력으로 세상의 변화를 즐기되 주변에 도움되는 유익한 존재라면 얼마나 멋있을까.
방안 가득 밀려드려는 햇빛이, 사선으로 막힌 가리개에 꺾이어 부셔진다. 이 밝음의 축복을 더위라는 이유로 내치는 오늘의 변덕이, 몇달 전의 아쉬웠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송구스러워진다.
이제, 싹 트임에서 성장으로 도약하는 5월의 정기를 심호흡으로 받아들이자. 열심히 경쟁한 결과로 세워진 LA시장의 의욕을 기대하며, 발전하는 행정을 함께 다져 가는 넉넉한 시민의 걸음을 내딛자. 서둘지 않는 질서로 풍요한 내일을 기획하여 깊은 사려와 언행으로 이 찬란한 계절을 기쁘게 구가하는 아름다움을 공유하자. 참 좋은 세상의 미래를 위하여.
이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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