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 32돌 대하시리즈 5 - 하와이편
▶ 피땀 눈물의 아메리칸 드림
한인 초기 이민자들은 ‘수확’이 빨랐다.
부모가 싹을 뿌린 ‘아메리칸 드림’을 바로 다음 대에 거둬들인 2세들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초기 이민자의 2세로 하와이 사회에서 일찌감치 지도적 위치를 확보한 대표적 인사로는 하와이대학 한국학센터 건설당시 기금모금위원회 회장을 맡았던 엔지니어 안정도(80)씨, 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연방판사에 임명된 장원배(77)씨, 하와이 최초의 플라스틱가공업체를 설립해 세계 유명인사전에 이름이 오른 프랭크 민(86)씨, 단군 이후 배달족 후예로는 최초로 하와이대학 이사장직을 역임한 김창원(72)씨, 미국내 유일한 한국계 시장 해리 김(62)씨, 아이리시계와의 혼혈인 리 도나휴 호놀룰루경찰국장 등을 꼽을 수 있다.
1904년 하와이로 건너와 사업가로 성공한 안원규씨의 아들인 안정도씨는 카일루아 수로공사, 마키키 홍수통제장치공사, 밀리라니 하수펌프장공사, 괌상업항구건설 등 하와이의 대형공사들을 도맡아 처리한 당대 최고의 엔지니어로 다섯 명의 딸 가운데 카렌 선숙 안 하와이 고법판사 등 세 명을 법조인으로 키워냈다.
장원배 전 판사는 평양출신의 사탕수수 노동자 장운찬씨와 부산태생의 사진신부 강봉희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 한순간도 내가 코리언-아메리칸이라는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다"는 그는 연방판사시절 한미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 목련장을 받았으며 주 하원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프랑크 민씨의 부친 민의경씨는 1904년에 마우이에 도착한 초기이민자. 민씨 역시 한때 사탕수수밭의 보조노동자로 일하다 군에 입대, 펄하버, 과달캐널, 북솔로몬, 필리핀 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이에 대한 포상으로 군당국으로부터 이른바 ‘GI장학금’을 받아 뉴욕대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했다. 졸업후 하와이 최초의 플래스틱가공업체 ‘민 플라스틱’을 설립한 그는 와이파후 플랜테이션 빌리지의 한국관을 관리하는 등 후대에 뿌리의식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탕수수밭 이민자의 9남매중 막내인 해리 김은 힐로 고교 교사와 민방위본부장을 거쳐 지난해 빅아일랜드 시장에 당선된 입지전적 인물. 선친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그는 호놀룰루주재 한국총영사관 등을 통해 잊어버린 부친의 이름을 알아내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아버님이 북한 출신이라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고.
아버지가 아이러리시계인 리 도나휴 호놀룰루경찰국장은 1921년 하와이로 이민온 사진신부 이필덕 여사의 아들. 한인여성 루실 경희 박씨를 아내로 맞아들인 도나휴 경찰국장은 백인에 가까운 외모를 지녔지만 한인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대단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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