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가 온통 검은색으로 보였다. 긴 검정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눈만 내놓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추웠다! 사계절 내내 온화한 캘리포니아를 뒤로하고, 하필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서울에서 겨울을 맛보았다. 쌀쌀한 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냉기가 잠들어 있던 감각을 흔들어 깨웠다.
낯선 곳을 향한 호기심이 나를 남쪽으로 이끌었다. 따스한 남쪽 바다에 즐비하게 놓인 섬들이 보고 싶었다. 갑작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는데도 동생들과 조카, 새 조카며느리까지 동의해 가족 열세 명이 먼 길을 향해 나섰다. 세 대의 차가 동원되었다. 쌀쌀한 날씨와 달리 차 안은 훈훈한 기운으로 데워졌다.
생소한 고속도로는 시간을 단축해 거리를 한층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겹겹이 펼쳐지는 산들이 진하고 연한 그림자를 드러내었다. 사이 사이에 뚫린 터널이 이어졌다. 그 터널들을 지나며 현실과 꿈의 경계 같은 고원을 통과하는 듯했다. 만연산을 넘고, 마침내 지리산 품 안으로 접어들었다.
지리산 기슭에서 뿌옇게 변하던 하늘은 말없이 눈을 뿌려주었다. 함박눈이다! 점점 굵어지는 눈송이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아 들며 잠시 어른의 시간을 내려놓고, 순진했던 어린 날로 돌아갔다. 얼마 만인가? 멀리 떠나 살다 다시 밟은 고국에서 맞는 눈송이다.
조용히 내려오는 눈은 오래된 기억의 문을 열어 주었다. 처음 밟은 곳이지만 낯설지 안았다. 눈송이 속에 그리움이 피어났다. 흰 숨결처럼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어린 시절 마당에서 뛰놀던 발자국과 둥그렇게 굴려 나뭇가지로 팔을 만들던 눈사람을 기억나게 했다. 난로 곁에서 손을 비비며 나누던 웃음을 하나씩 불러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눈이 감싸는 온기를 느꼈다. 싸늘한 땅을 덮어 상처를 감추고, 거친 일상의 모서리를 둥글게 감싸는 듯했다.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은 어느 사이 산과 대지를 덮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세상으로 바꾸었다.
하얀 세상은 타국으로부터 내가 비로소 돌아왔음을 알게 했다. 시간은 잠시 멈춰 순백의 침묵 속에 나를 내려놓았다. 날 쉬게 했다. 함박눈은 말없이 속삭였다. 여기는 네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고. 하얀 눈송이가 겹쳐 앉으며 마음은 오래 잊고 지냈던 고향의 온도를 되찾았다.
조카 결혼식 날에도 눈이 내렸다. 마치 축복하는 하늘의 손길로 여겨졌다. 곱게 차려 입은 한복 위로 눈송이는 살포시 앉았다. 축하객들의 통행에 지장이 될 거라는 염려가 들었지만, 나는 그저 마음껏 기뻐했다.
서울을 떠나는 날, 하늘은 하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눈이 내리자 시민들의 발걸음은 분주해졌다. 지하철을 이용하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공항까지 가려면 교통체증이 심할 테니 미리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내 눈은 쌓이는 눈 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하얀 세상을 마음에 담고 싶었으니까. 얼어붙은 풍경을 넘어 포근한 위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매서운 겨울 한복판에서, 차가운 공기와 달리 마음만은 온기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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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숙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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