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다. 매주 토요일은 맨해튼 타임스퀘어로 복음 전도를 나가는 날이다.
어깨를 맞부딪치던 도시의 분주함이 한파로 헐거워졌다. 전도를 마치고 나니, 이미 맨하탄에 들어선 발걸음을 이내 집으로 돌리기가 아쉬웠다. 나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현대미술관, MoMA에 들렀다.
전시장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입체파(Cubism)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 작품인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클로드 모네의 수련 (Water Lilies)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The Persistence of Memory)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또한 강렬한 색채로 표현해 생명력과 리듬감이 넘치는 앙리 마티스의 춤 (Dance I) 과 오스트리아의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희망 II (Hope II) 를 마주하며, 화려한 색채 너머에 있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노화와 죽음, 그리고 탄생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보며 시(詩)적 은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전시실 2층, 하얀 벽면에서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형상의 조각품을 보았다. 그것은 하늘을 나는 새의 모습 같기도 하고, 모든 고뇌를 떨구고 비상하려는 연약한 인간의 날개짓 같기도 했다. 이 작품은 후안 프란시스코 엘소(Juan Francisco Elso)의 아메리카 상공을 나는 새 (Bird that Flies over America) 이다.
작품 앞에서 왠지 마음 한구석에 서늘한 바람이 인다. 저 앙상한 모습은 오래전, 이민 가방을 꾸려 날아오던 나의 날개죽지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 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 속 산티아고
노인은 망망대해에서 고독과 사투를 벌이며 청새치를 잡았지만, 상어 떼의 습격에 살점은 모두 뜯겨 나가고 남은 것은 하얀 뼈대뿐이었다.
우리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열정, 사랑, 부와 명예라는 군더더기들도 죽음이라는 항구에 닿을 때는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저토록 앙상한 뼈대뿐이리라.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드는 나에게 그 뼈대의 형상은 약간은 두려운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물을 다르게 보는 반전의 시선 또한 연륜이 내게 남겨 준 지혜인 것이다. 조형물이 아름다운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비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철사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면 빛은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이 발라진 덕분에 공기를 품고, 빛을 투과시키며 배경과 하나가 되었다. 꽉 채워진 덩어리가 아니라, 안과 밖이 소통하는 열린 구조가 작품의 우수성이리라.
작가 엘소는 서른한 살에 운명을 달리했지만, 영원히 썩지 않을 정신의 골격을 이 작품에 남겼다. 소설 속에서 노인 역시 상어 떼에게 살점을 내주었을지언정, 노인이 남겨온 뼈 또한 패배나 허무가 아니었으리라. 그 거대한 척추와 꼬리의 형상은 노인이 바다와 얼마나 치열하게 대화했는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어부였는지를 증명하는 불멸의 기록 이리라.
사라지지 않은 뼈는 삶을 지탱했던 가장 단단한 본질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 또한 숱한 파도를 넘으며 불려왔던 살점들, 이제는 하나둘 내려놓고 가벼워져야 할 때가 아닐까.
욕심과 집착이 빠져나간 자리에 비로소 나의 본질인 시(詩)와 노래가 뼈대처럼 남을 테니까. 작가의 작품 속 마른 날개가 허공을 껴안듯, 나 또한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세상의 풍경을 더 투명하게 은유하며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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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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