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복강 속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장기는 간이다. 특별한 병적 요인이 없다면 간은 대체로 자기 몸무게의 1.5~2% 내외를 유지한다. 압도적인 덩치로 보나, 500여 가지의 복잡한 화학반응 및 대사작용을 담당하고 있는 걸로 보나, 우리 몸을 구성하는 장기 중에서 단연 맏이격이다.
맏이란 어떤 존재인가. 자녀 하나가 귀한 지금과는 달리, 시계를 한 세대 전으로 되감으면 맏이는 어느 집에서나 흔한 풍경이었다. 가족 내 복잡 미묘한 역학 관계 안에서 책임감과 부담감을 동의어처럼 가슴에 새기고 살던 그때 그 시절의 맏이들. 그들은 침묵 속에서 참고 또 참았다. 집안의 안녕을 위해,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체중이 적정 범위를 넘어서기 시작하면 간은 주인도 모르게 여분의 영양소를 지방의 형태로 간세포 내에 차곡차곡 저장한다. 지방의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보니 간의 무게로 예상한 부피보다 훨씬 더 비대해지게 마련이다. 흔히 무모한 이에게 ‘간이 크다’고 말하곤 하는데, 사실 이렇게 비대해진 간은 웬만한 자극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스스로 비대해지며 망가질지언정 신호를 보내지 않는 고집스러운 인내, 우리가 간을 ‘침묵의 장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만성 간 질환은 자각 증상이 없다. 간을 싸고 있는 얇은 막이 일시적으로 팽창되는 경우에만 우측 갈비뼈 안쪽에 통증을 느낄 뿐이다. 간은 묵묵히 질병을 버티다 더 이상 기능을 유지할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라서야 복수나 간성혼수, 토혈 등의 형태로 그간의 상처를 드러낸다. 그 많은 인고의 시간을 묵묵히 참다가 마지막 쓰러질 때 그의 기능 상실을 알리는 셈이다.
간질환의 위험 요소를 갖고 있는 분들이 반드시 6개월에 한 번씩 검진을 받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증상이 나타났을 땐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련하고 아둔해 보일 만큼 다른 장기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애쓰다, 죽을 만큼 힘든 지경이 되어서야 간은 비로소 그의 아픔을 알린다.
간 수술을 하는 의사 입장에서는 다른 장기의 고통을 듣기만 하고 정작 제 고통에는 과묵한 간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야속하다. 방관으로 이어지는 침묵이 우리 사회에 어떤 병폐를 남기는지는 역사를 통해 이미 뼈저리게 배웠다. 나치 시절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가 말한 것처럼 침묵의 대가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가혹하다.
우리 사회는 지난 세월 침묵했던 후과를 교훈 삼아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능동적인 선택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왔다. 이러한 논리는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통한다. 영화 건축학개론이 그토록 애잔했던 건 말할 수 없이 과묵했던 주인공이 끝내 침묵하는 바람에 첫사랑을 짝사랑이라는 미완의 마침표로 끝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침묵은 그렇게 해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이 금’이라는 옛말이 여전히 유효한 순간은 있다. 설 연휴 모처럼 마주앉은 가족과 친지들 앞에서는 이 격언을 명심해야 한다. 평소 안부를 묻는 연락조차 없이 지내다가 궁금하지도 않은 개인사를 들춰내고 있지는 않은가. 답변 하나하나를 꼬집어 시시콜콜 충고하면서 상대의 마음을 후벼파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침묵이 바로 금이다. 이번 설 연휴엔 애정이라는 이름의 간섭 대신 따뜻한 시선을 건네보자. 목소리는 동계 올림픽에서 투혼을 발휘하고 있는 선수들을 응원할 때만 높여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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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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