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LA의 한 대학원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게 가장 낯설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온 단어가 있었다. 정치적 올바름, 이른바 ‘PC(Political Correctness)’였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뤘지만 여전히 권위주의적 정치문화에 익숙했던 한국과 달리, 미국 사회는 이미 언어와 인식의 문제를 사회적 책임의 영역으로 다루고 있었다. 이는 학계에만 국한된 논의가 아니라 일상의 감수성이었다.
PC주의는 인종, 성별, 장애,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누군가가 부당하게 배제되거나 낙인찍히지 않도록 언어와 제도, 관행을 점검하자는 문제 제기다. 다수를 기준으로 소수를 규정해 온 관행을 되묻는 시도였고, 백인·남성·비장애인을 암묵적 ‘정상’으로 설정해 온 사회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한인 커뮤니티의 경험으로 보면 PC주의는 보이지 않는 혹은 노골적인 차별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에 가까웠다. 소수계(minority)로서 한인들의 목소리가 공적 공간에서 쉽게 무시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였고, 차별을 개인의 예민함으로 축소하지 않게 만드는 사회적 합의였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며 PC주의가 변질됐다는 점이다. 배려에 대한 권유가 아니라 도덕적 의무이자 정치적 충성 시험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 표현의 실수는 맥락과 의도와 무관하게 인격의 결함으로 환원됐고, 토론은 논증보다 도덕적 판단이 앞섰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피로감과 반발이 쌓여갔다.
이 피로감을 가장 영리하게 정치화한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였다. 그는 PC주의를 “엘리트가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장치”로 규정하며 반PC를 대중 동원의 무기로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반PC가 가져온 것은 자유의 확장이 아니라, 권력의 언어가 노골적으로 거칠어지는 퇴행이었다.
가장 분명한 사례는 이민 정책이다. 2017년 출범한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무슬림 입국 금지’와 국경 ‘제로 톨러런스’ 정책을 통해 이민자와 그 자녀를 강제 분리 수용했고, 이들을 “범죄자” “강간범”으로 호명했다. 이후 아시아계를 겨냥한 혐오범죄가 급증하면서, 한인 이민자들 역시 사회적 불안과 차별적 시선을 일상에서 체감해야 했다.
2025년 재집권한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는 반PC가 노골적으로 제도화됐다. 연방기관과 학교에서 다양성·형평성·포용(DEI) 프로그램이 공격받았고, 성중립적 표현이나 구조적 차별이라는 용어 자체가 문제시됐다. 비판적 인종이론(CRT)을 둘러싼 논쟁은 인종차별의 역사와 현실을 이념 편향으로 몰아갔다.
문화 영역에서도 반PC 담론은 반복됐다. 트럼프는 언론과 예술계를 PC에 중독된 엘리트로 낙인찍었다. 표현의 자유는 권력을 감시하는 권리가 아니라 권력이 불쾌한 언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할 자유로 재정의됐다. 그 과정에서 한인 커뮤니티의 공적 발언이나 정치 참여 역시 과도한 배려 요구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결과는 아이러니했다. PC주의 아래에서 억눌려 있던 인종·이민·젠더 문제에 대한 노골적인 편견과 혐오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다시 공적 공간으로 쏟아져 나왔다. PC주의가 가려왔던 것은 차별 그 자체가 아니라, 차별을 공적으로 제어하던 최소한의 규범이었음이 역설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돌이켜 보면 반PC를 명분으로 한 트럼프식 퇴행은 라티노와 중동계 이민자에 대한 증오로 번졌고, 합법적으로 살아가는 흑인과 아시아계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이는 다시 트럼프의 정치적 사병처럼 행동하는 연방 이민단속 요원들에 의한 무차별적 폭력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지금의 미국은 ‘각자도생의 시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시대’라 불러도 과장이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야만이었다. 이런 가운데 오바마 전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원숭이 오바마’ 이미지가 포함된 영상을 올린 인종차별적 게시물에 대해 따끔한 반응을 내놓았다.
그는 “이것은 우리가 믿는 미국이 아니다. 여전히 품위와 예의, 친절을 믿는 많은 미국 시민들은 이런 방식의 담론을 지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트럼프 시대에 PC주의를 다시 ‘소환’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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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희 부국장대우·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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