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지나가는 세 종류의 인간상을 그리는 이야기들이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늘 이 세상에 분명 존재함을 우리들은 대개 알고들 있다 하겠다. 많이 아는 식자들도, 성직자들도 있다지만 그리 소용이 없고 오직‘실천’하는 사마리아인만 못함이니라. 불쌍히 여겨 돌봐주며 보호소에 데려가 간병을 부탁하며 돌아올 때 다시 들러 사례를 약속하고는 떠난다.
수십년 전 병원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가 있어 응급 의료팀이 환자가 있는 병동으로 모두 달려가는 판에 막상 달려가야 할 책임 있는 의료진의 한 사람이 환자와는 반대방향, 아니 도망가는 게 아닌가! 이건 극단적 예이지만 이와 비슷한 경우가 왜 없겠는가.
필자가 은퇴한지도 10년이 지났다. 우선 은퇴하면 많은 이들이 생활에 경제적, 신체적으로 별 지장이 없으면 여가 선용 이외에 생각하는 것이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어디 가서 자원봉사 활동하려는 것이 아닐까.
필자도 집사람을 위시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런 권고를 받아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마음에 썩 와 닿는 말은 아니었다. 왜? 의사라는 직업자체도 그렇지만 생계수단으로서의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그래도 본인은 외람된 말씀이나 항시 봉사관념으로서의 40년 이상 의사생활을 해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무슨 봉사생활이 필요하겠는가. 더 이상 할 수만 있다면야 그처럼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지쳤다고나 할까.
생각나는 사실 하나가 더 있다. 시쳇말로 성공한 삶을 살았던 분이 은퇴 후 성직자가 되신 분인데 자랑스럽게 목회활동으로 봉사를 시작하려한다는 큰 포부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동기와 포부는 존경 할지언정 진정의 의도는 무엇인가? 여유로운 성공된 삶은 사후 또 하나의 명예를 위한 삶을 보란 듯이 시작하려는 것이 아닌가?
진정 약한 자, 갈구하는 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먼저 이해하려 노력하며 그들과 같이, 그들 속에 고통을 함께하려는 정신이 과연 그를 지배하고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어 대화의 끝이 씁쓸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자원봉사 이야기가 나오면 먼저 떠오름은 무엇일까.
무슨 도움보다도 자신들의 처지와 고통을 이해하려는 분들을 그들은 절실히 갈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하고 마땅히 그래야만 함이 제일 우선적이어야 함의 중요성을 잊지 말자.
배부른 자가 먹다 남은 고깃덩이를 주는 것보다 비록 자신이 가진 것이 변변치 못하나 아껴 놓은 자신이 먹을 빵 몇 조각을 배고픈 이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원래 자선, 봉사라는 말 자체가 적합한 용어는 아닐 게다. 다만 여지껏 받아오고 누린 혜택이 자신의 노력이 일부 없었던 건 아니겠지만 근본적으론 절대자로부터 은연중 받아온 행운의 결과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빚을 갚는 행위’로서가 바로 봉사라고 한다면 한없이 겸허해져야 합당하지 않을까!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회는 헌신적인 더 많은 자원봉사들을 필요하고 또한 그분들의 희생과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려야함은 물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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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길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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