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에 들어서자 사방이 고요했다. 한여름 햇살에 지친 잔디는 나무 그늘로 몸을 기울이고, 땅은 더운 숨을 내쉰다. 묘비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존 스타인벡의 안식처를 찾아 캘리포니아 살리나스의 ‘가든 오브 메모리즈’를 찾았다. 오전에 박물관 안내인은 묘지가 해밀턴 구역(Hamilton Plot), 로미 레인 입구 근처에 있다 했지만, 안내판은 보이지 않았다. 몇 바퀴를 돌다 묘지 한편에서 의자에 앉은 여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녀는 정확한 위치를 몰랐지만 함께 찾아 나섰다. 안내판은 누군가가 자주 뽑아가 기념품으로 보관한다고 했다. 누군가에겐 소중한 기념이겠지만, 나 같은 방문객은 길을 잃는다.
세 사람이 흩어져 찾던 끝에,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Hamilton’이라 새겨진 큰 비석이 보였다. 어머니 올리브 해밀턴 스타인벡의 성이었다. 드디어 찾았다. 함께 애써준 빅토리아에게 고맙다고 하자 그녀는 “박물관에도 가보라”고 했다. 이미 생가에도 다녀왔다 하니, 그녀는 감탄하며 ‘하이 파이브’를 건넸다.
묘비 옆 잔디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그는 부모 존 어니스트 스타인벡, 올리브 해밀턴 스타인벡과 함께 묻혀 있었다. 묘비에는 ‘John Steinbeck 1902~1968’ 이름과 숫자만 새겨져 있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놓고 간 연필 몇 자루가 햇살에 빛났다. 장식도 문구도 없는 단출한 비석, 마치 그의 문장처럼 군더더기 없는 침묵이었다.
1968년 12월 20일,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66세의 나이였다. 평생의 흡연이 그의 건강을 무너뜨렸다. 유해는 가족의 뜻에 따라 그가 사랑했던 고향 살리나스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서 배우 헨리 폰다가 헌시를 낭독했고, 테니슨의 〈유리시스〉와 시편 121장이 울려 퍼졌다.
“나는 산을 향해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그 구절은 스타인벡의 삶과 문학 속에서 그가 찾던 믿음과 닮아 있었다.
그의 작품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다. 『분노의 포도』에서 대공황의 절망 속에서도 로즈 오브 샤론의 젖이 한 생명을 살린다. 절망 끝에서 피어난 희망, 그것이 그의 문학이었다. 『에덴의 동쪽』에서는 죽음을 “불멸성을 부인하는 침입자”라 썼다. 『쥐와 인간』의 조지는 친구 레니를 직접 죽이며 인간의 연민과 비극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의 작품 속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묻는 물음이었다.
그는 현실을 기록한 작가이자 인간 존재를 탐구한 사상가였다. 『불만의 겨울』에서는 도덕적 타락과 갈등을, 『찰리와 함께 여행』에서는 변해가는 미국을 바라보며 인간의 본질을 되물었다. 그에게 문학은 사회의 거울이자 인간의 양심이었다.
묘비 옆에 떨어진 연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에덴의 동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시인은 허약하다고 여겨졌지만, 시는 인간의 강인함을 증명한다.”
그는 하루 수백 자루의 연필을 깎아가며 글을 썼다. 연필은 그의 무기이자 생명선이었다.
나는 그 연필을 그의 이름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움직입니다.”
묘비는 간결했지만, 그의 문장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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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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