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대전 이후 미국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정치인을 꼽으라면 로널드 레이건이 첫 순위에 오른다. 그는 인플레와 고실업에 시달리던 미국 경제를 살리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며 기세를 올리던 소련의 팽창주의를 저지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듯 하던 미국을 부흥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또 근자에 보기 드문 확신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는 80년 대선 캠페인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한 규제 완화와 감세, 그리고 공산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한 군비 증강을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그가 당선된 후 이같은 정책을 펼쳤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내건 공약으로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된 후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
소신을 공약으로 걸고 국민의 신임을 받아 이를 실천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누구도 속았다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를 의식해 할 생각도 없는 말을 하고 당선됐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바마는 2008년 대통령 선거 때 북미 자유무역 협정(NAFTA)의 폐해를 지적하며 자신이 당선되면 캐나다와 멕시코 등 협상 대상국과 재협상도 불사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놀란 캐나다 정부가 진위 여부를 확인하자 오바마 보좌관은 “이는 선거용일뿐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새 나갔다. 당시 오바마는 이를 극구 부인했지만 선거 후 이는 사실로 확인됐다.
물론 2008년 대선 당시 NAFTA를 비판한 것은 오바마만은 아니다. 그의 강력한 경쟁 상대였던 힐러리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노조 등 NAFTA 비판 세력의 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오바마가 올 들어 NAFTA보다 규모가 훨씬 큰 환태평양 동반자 협정(TPP)과 관련해서는 그 때와 입장을 180도 바꿨다. 그는 일본, 칠레, 호주 등 태평양 연안 11개국과의 무역 장벽을 허무는 이 협정이 미국 경제를 살리는데 긴요할 뿐 아니라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는데 필요하다며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지만 민주당내 반응은 냉담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대통령이 될 때 이에 관해 당내 지지를 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노조 측에서 보면 NAFTA도 폐기하겠다던 사람이 TPP까지 추진하겠다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일 것이다. 엘리자벳 워런 연방 상원의원 등 당내 좌파가 TPP를 비판하자 오바마는 이 문제에 관해서 워런 의원은 “절대적으로 잘못”이며 워런 또한 “정치인에 불과하다”며 민주당의 뜨는 별인 워런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실시된 지난 주 연방 상원 표결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TPP 승인에 사실상 필수적인 대통령에 무역 진흥권(TPA)을 주는 법안에 모두 반대함으로써 이것이 의제로 상정되는 것을 막았다. TPA를 얻어 체결된 협정에 대해서 의회는 찬성과 반대만 할 수 있을 뿐 수정 권한이 없어 끝없는 수정으로 협정을 매장시킬 수 있는 길이 봉쇄된다. 오바마는 그 후 민주당 의원들을 부랴부랴 백악관으로 불러 도움을 요청했고 그 후 상원은 TPA 법안을 의제로 채택하는 것을 승인했지만 같은 당 소속 현직 대통령에 이처럼 많은 의원들이 반기를 든 것은 드문 일이다.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것은 힐러리의 침묵이다. 사실상 차기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힐러리는 국무장관 시절 자신이 추진했던 프로젝트임에도 이와 관련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선거가 없는 오바마와는 달리 노조의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은 알겠으나 지금 말이 없다 대통령이 된 후 이 사업을 맡아 추진하려면 오바마와 같은 망신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대통령 랭킹에서 항상 1, 2, 3위에 오는 워싱턴과 링컨,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모두 확신 정치인이었다. 역사에 흔적을 남기는 인물은 유권자의 눈치만 보는 풍향계가 아니라 확신 정치인들이다. 힐러리가 그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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