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6월28일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 대공이 세르비아 독립 단체인 ‘검은 손’ 단원에게 암살당하기 직전까지 유럽은 전례 없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진 후 유럽에는 거의 100년 가까이 큰 전쟁이 없었고 산업 혁명 이후 계속된 기술 혁신으로 유럽인들은 물질적으로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이날로 끝났다. 페르디난드가 죽으면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그와 동맹을 맺고 있던 러시아는 전군 동원령을 내렸으며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독일은 8월 벨기에를 침공했다. 전쟁이 터지자 유럽인들은 일제히 반겼다. 오랜 평화에 싫증난 이들은 전쟁이 가져올 모험에 흥분했으며 젊은이들은 앞 다퉈 전선으로 나갔다.
그러나 수주, 길어도 크리스마스 전에는 끝나리라 믿었던 전쟁은 4년이 넘게 계속됐고 900만 병사와 700만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투의 실상도 기마대를 이끌고 용감하게 적을 무찌르는 낭만적인 상상과는 달리 진흙더미 참호 속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땅 몇 뼘을 뺏기 위해 돌격하다 독개스나 기관총에 맞아 몰살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18년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다. 소득 없이 희생을 치른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의 불만도 컸지만 패전에 영토까지 뺏기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된 독일의 분노와 좌절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거기다 1929년 대공황으로 대량 실업까지 발생하자 독일 국민들은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할 구세주를 찾기 시작했다.
그 때 혜성 같이 나타난 것이 실업자와 노숙자로 거리를 전전하다 1차 대전에 참전, 일약 용맹을 인정받은 히틀러다. 선전선동의 천재인 그는 집권하자마자 군비를 확충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후 비무장지대가 된 라인란트를 찾아오고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합병한 후 폴란드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유럽의 평화를 위해 히틀러에게 양보와 양보를 거듭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서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이 끝나고 세계는 전례 없는 평화의 시기를 맞는 듯 했다. 80년대 초부터 2000년까지 장기 호황이 계속되자 ‘역사의 종언’이란 책이 주장한대로 자유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는 이제 경쟁자 없는 체제로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해 하이텍 버블이, 그 다음 해에는 9/11 사태가 터졌다. 그리고 2008년에는 ‘우리 시대의 대공황’으로 불리는 ‘대불황’이 닥쳤다.
그리고 이제 공산주의 몰락과 함께 무너진 소련이 부활을 꿈꾸고 있다. 지난 2월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 반도를 먹어치운 러시아의 푸틴은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동부를 침공, 사실상 이곳을 장악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반응은 히틀러가 라인란트와 오스트리아, 체코를 집어삼켰을 때와 놀랍게도 유사하다. 국력은 러시아와 비교도 안 되지만 오랜 전쟁에 지친 미국은 이에 개입할 의지가 전혀 없고 러시아와 개스 공급 등 이해가 얽힌 유럽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분할한 뒤 푸틴의 목표는 가까스로 독립을 얻어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 해 3국이 될 것이다. 여기 살고 있는 러시아계 주민을 부추겨 소요를 일으킨 후 자국민 보호를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고전적 수법을 쓸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에게 체코를 넘겨준 후 뮌헨에서 평화협정을 맺고 “이것으로 우리 시대의 평화를 얻었다”고 선언했던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은 어리석은 정치인의 대명사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면 체임벌린만 너무 욕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훗날 역사가들이 21세기 초 정치인들을 보고 뭐라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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