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지고 있는 습성 중에 가장 나쁜 것 하나를 들자면 무엇이든 잘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민 보따리에 끼워져 태평양을 건너온 대학 때의 노트부터 남편과의 연애 편지, 손때 묻은 영한 사전, 아이의 레고 장난감과 베이스볼 카드 등등.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며 상자에 넣어 봉하고는 겉에 날짜와 품명을 적어 차고의 높은 선반이나 지하실 창고 속에 넣어 둔다.
언제 다시 대학 노트를 펴 볼 것이며, 아이가 언제쯤 장가를 들어 손자가 생기고, 그 아기가 제 아빠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을지는 아무런 기약도 없으면서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자지고 있다.
상자 속에 갇힌 내 추억들이 밖으로 나와 옛 시간을 회상하며 기억의 안개를 피워 줄 수 있을런지, 아니면 상자들은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삶의 짐이 되어 공간만 차지 하고 있을런지……
그 상자 들 중 가장 최근에 정리를 했던 것은 간호사 유니폼을 넣은 상자이다. 한국에서 입었던 흰색 원피스의 가운이야 진작에 작아 져 버려야 했지만 지난 20년 동안의 세월이 베어 있는 유니폼들은 대충 입을 만 했다.
미국에서 처음 간호사가 되었을 때는 약간 짧은 듯한 미니 스커트의 치마 바지 형이 유행이었고 점차 꽃무늬들로 화사하게 변해 갔다.
그러나 중환자실에서는 안정정인 단색의 바지와 편안한 윗도리를 선호하게 되었다. 노랑, 분홍, 파랑, 초록 등등의 아래위 한 벌로 된 유니폼이 주를 이루고 해마다 두 서너 개씩 새 것을 샀고 가끔은 친한 친구가 직접 본을 떠서 자르고 박음질을 하여 만들어 주기도 했으니 숫자는 한 상자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입었던 나의 유니폼. 편안한 작업복이며, 전문직업인의 상징이었던 것을 케이스매니저라는 이름과 함께 벗어 버렸다.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평 간호사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잘 싸 두었고 습성처럼 지하 창고 속에 넣어 두었다.
그러던 얼마 전, 한 친구가 유니폼을 입는 새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녀는 나보다 훨씬 키가 끄고 날씬했기에 내 유니폼이 잘 맞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하고 물어 보았는데 흔쾌히 입겠단다. 너무 낡았고, 사이즈가 잘 안 맞을 수도 있고, 남이 입던 것이니까 꺼름직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선득 입겠다는 대답에 상자 채 건네 주었다.
상자 속에 담긴 세월들, 유니폼과 함께 했던 내 지나간 시간. 환자들의 생과 사의 시점에서 발 빠르게 뛰어 다녔고, 편안한 삶의 마지막 길에서 손잡아 주는 사람이 되기도 했으며, 어떤 이의 다시 찾은 생명에 진실로 감사해 하기도 했다.
올빼미같이 밤을 새우며 일을 했던 밤 번 간호사의 시절도 있었고,“No”소리를 못해 더블로 근무를 하던 길고 힘든 시간도 있었다.
처음 받아 본 미국 병원의 봉급에 감격 했던 간호사 초년병의 시간, 일주일의 반은 학생, 반은 간호사였던 정말로 열심히 살았던 시간도 그리 오래 전의 이야기는 아닌 듯 가까운 기억 속에 있다.
결근을 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감기가 폐렴이 되어 쓰러지면서도 출근을 했던 무리함도 그 안에는 담겨 져 있다.
지난 시간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을 것이다. 내 세월의 상자를 오롯이 그녀에게 내 주며 나의 세월과 동행하는 그녀의 행복도 기도해 본다. 오늘 밤은 참 따뜻한 꿈을 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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