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가란 할머니가 종이접기로 만든 공예품과 증손자들을 위해 손수 뜨신 스웨터들을 갖고 나와 자랑하는 며느리 최양숙 씨와 함께.
햇빛 밝은 방, 안가란(家蘭) 할머니의 침대에는 뜨개질 뭉치 몇 개가 놓여있다. 며느리 최양숙 씨와 함께 거실로 나오는 안가란 할머니에게서, 102라는 초현실적인 숫자를 초월해 그저 친정 엄마와 같은 편안함이 느껴온다.
“참 착해요. 참 잘해줘요” 며느리를 향해 하는 말이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의 큰 사랑에는 못 미칠 것입니다.” 며느리의 말이다. 넷째 아들 김종수 씨에게 1986년 쌍둥이 아들 브라이언과 앤드류가 태어나자 75세 나이에 아이들을 돌봐 주러 미국에 온 안 할머니, 올해 쌍둥이 중 한 명은 의대를 졸업하고, 다른 한 명은 결혼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한다.
2010년 백수 감사예배 때, 안 할머니가 25년째 아들 내외와 함께 다니고 있는 웨체스터 연합교회 의 이태준 목사는 “아는 게 없다고 하시는데 더 지혜로운 삶을, 가진 것이 없다고 하시는데 더 풍성한 삶을, 할 수 없다고 하시는데, 능치 못함이 없는 삶을 보여주신다”고 말했었다. “난 아는 게 없어요.”라고 거듭 말하는 것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이다. 평양북도 북창이 고향인 안 할머니는 남편에게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그 당시 부군 김덕교 씨는 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평양에서도 엘리트만 다니던 약송 소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해방 무렵에 경기도 곤지암 학교로 전근하면서 가족이 이남으로 오게 되었다. 세 명의 자녀를 데리고 미리 발령지에 와 있는 남편을 찾아 우여곡절을 겪으며 남쪽으로 올 때 배를 타고 마포로 들어 왔다고 한다.
“그 때 배삯이 1원 50전이었어요.” 하고 말하는 안 할머니, 고향을 떠나와 이남에서 4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시골 교사 월급으로 7명의 자녀를 키우느라 바느질로 가계를 꾸려나갔다. 48세에 남편이 죽고 이미 변호사이던 맏아들 김종표 씨가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아 줘서 그 때부터는 고생을 안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편 없이 아이들을 모두 훌륭하게 성장시켜 결혼시키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16명의 손자들을 키워주고 17명의 증손자들까지 일일이 배려해준
50년이상 세월이 어찌 했을 지는 가히 짐작가는 일이다.
백수 축하연 때 한국에서 자녀 김종표, 종애, 종추, 종산, 은자 씨 가족이 왔고 현재 화이트 플레인즈에 거주하고 있는 맏딸 령자 씨와 그리고 종수 씨 가정이 모두 참석했다. 이것은 안가란 할머니가 긴 세월을 한결같이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풍성한 사랑을 베풀며, 매사 긍정적으로 자족하며 살아온 삶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는 뜨개질, 채소를 사 먹지 않고 뒷마당 텃밭 가꾸기, 공예품 만들어 선물하기 등…. 장수 비결은 무엇보다도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는데 있다고 할 수 있을까.
3년 전 집안에서 넘어져서 수술한 후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일어서시는 노력에 주변사람들을 감동시킨 안 할머니, 지난번 H마트 오픈 날, 매장을 직접 둘러보는 그 적극성 또한 장수의 비결일 것이다. “안 권사님처럼 살고 싶어요.”라는 이태준 목사의 말이 우리 모두의 바램이다. <노려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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