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교육 방법이요? 가치있게 살려 노력하세요”
자녀교육의 전설로 통하는 전혜성박사. 학자, 아내, 어머니, 자원봉사자, 어느 역 하나 소홀하지 않고 살아온 그는 ‘6.25와 전쟁고아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의 이미지를 선양시키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한국 알리기’ 선구자의 길을 걸어온 전박사가 뉴욕에 왔다. 그를 전화인터뷰 했다.
지난 11월11일~12일 맨하탄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파슨스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는 동양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강의가 열리고 예일클럽에서는 국제패션 갈라 ‘패션 디아스포라-소매에 당신의 문화를 입기’가 진행되었다. 행사의 중심에는 전혜성(82)동암연구소 이사장이 있었다.성신여자대학교, 뉴욕파슨스 디자인스쿨,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 일본 민속학 박물관이 함께 개최한 쇼에는 한국과 세네갈 등의 전통복식과 뉴욕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소개됐다. 이날 기금모금 옥션도 함께 진행되었는데 전혜성 박사가 직접 그린 동양화는 고가에 팔렸다.
"70세에 일본 교토 미술사 선생에게 동양화를 배웠다. 이 그림은 한국의 호랑이와 나무꾼을 그린 것으로 효도에 대한 내용이다. 그림을 시작한 것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 하나에 한국의 민속과 숨은 가치관이 6~7개가 들어가기 때문이다.“고 말문을 연 전박사는 민속의상쇼를 한 동기를 설명한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패션쇼를 하고 설명회를 하는 것은 한국 문화를 더 쉽게, 더 넓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전통의상을 소개하면서 중국과 몽고 사이에서 수천년 역사를 보존한 한국이 서로의 역할에 마찰이 없게 하고자 계급이 생겼다는 가치관이 성립되면 더욱 더 한국문화를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뉴욕 쇼와 인터내셔널 컨퍼런스에는 오랜 준비가 있었다.
“작년 11월부터 왜 조선시대가 현대화 하는데 늦었는지 연구했고 마지막 3개월은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1952년 고(故) 고광림 박사와 전혜성 박사 부부가 설립한 동암문화연구소 (eastrock institute)는 꾸준히 차세대 양성과 한국 이미지 위상을 위해 일해 왔다.“무조건 한국을 배우라고 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에 한국 커리큐럼을 넣기 위해 노력하고, 예를 들면 현재 유행인 K팝 전문가를 불러 강연회를 갖거나,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본 일제하의 한국 세미나를 위해 고종황제의 친손녀 이해경 왕손을 뉴욕에서 초빙하기도 했다.”는 전박사는 3년 전 은퇴하여 연구소 일은 뒤에서 돕고 있다. 현재 동암연구소 회장은 크리스토퍼 박 박
사(슬론 캐터링 의대교수)이다.
“박박사는 예일대 1학년때부터 22년동안 자원봉사했다. 인턴으로 자원봉사자로 일한 청년들은 현재 변호사, 의사 등 주류사회 지도자급으로 성장, 행사때마다 타인종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온다. 이들 젊은이 20명이 뉴욕 행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2월초에 이들을 위한 파티를 뉴욕에서 열 예정이다.”
19세의 앳띤여성 전혜성이 미국에 온 것은 경기여고를 졸업, 이화여대를 2년 다니다가 펜실베니아 디킨스(Dickenson) 대학으로 전액장학금을 받고서였다. 21세에 고광림 박사를 만나 22세에 결혼, 4남 2녀를 낳아 키우며 보스턴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과 미술을 배웠다.
그는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문화를 비교연구 하여 그 특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싶어 1960년대인 그때, 로마자가 아닌 비로마자를 모두 컴퓨터 코드화 하는 비교문화정보 체계를 만들었다. 컴퓨터에 한자, 한글, 로마자도 없는 그 시절, 전박사가 고려대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컴퓨터 강좌를 했더니 1968년 한국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여자가 무슨 학문이고 전자계산기더냐” 하는 비난의 기사였다. 당시 컴퓨터라는 말도 없어 전자계산기라는 단어를 썼다. 남이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을 선구자로서 해온 전박사에게 이르는 말이었다. 이 시스템을 토대로 일본국립민족학박물관과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객원교수로 초청받고 1960년대 미국 유네스코 대표로 파리에도 자주 가며 컴퓨터 강좌를 했다.‘한국은 6.25와 전쟁고아의 나라’로 알려진 그 때, 어떤 롤 모델도 없던 시절,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는 그의 옆에는 초대 주미특명전권 공사이자 보스턴 한인회장을 한 부군 고광림 박사가 있었다. 부부는 예일법대 강단에서 1963년부터 66년까지 가르쳤고 이후 3남 해롤드와 차녀 경은이 정교수로 강의, 한가족 4명이 가르친 것은 최초로 예일법대 역사가 되었다.
전박사는 “나라는 개념이전에 자식이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라며 먼저 차세대를 생각한 분이었다. 본인은 고생하더라도 가족의 안전을 위하고 극진한 사랑을 준 모범 아버지”하고 고광림 박사를 추모한다.그렇게 키운 4남2녀(장남 고경주: 예일대 졸업, 오바마 정부 보건부 차관보, 장녀 경신: 하버드
졸업, 중앙대 화학과 교수, 차남 동주: 하버드 졸업, 매사추세츠의대 학장, 삼남 홍주: 하버드 졸업, 국무부 차관보급인 국무부 법률고문, 차녀 경은: 하버드 졸업, 현 예일대 로스쿨 석좌 임상교수, 막내 정주 하버드대 졸업, 미술가)는 모두 주류사회에서 한 몫하고 있어 자녀교육의 전설로 통한다.
아이비리그 대학의 등록금이 굉장할텐데 어떻게 살았을까, 이 대목에서 전박사는 할 말이 많다.“4명이상은 장학금을 안준다. 6명이 다니는데 위로 넷은 장학금 받았으나 밑의 자식들 등록금을 어떻게 해내었나 싶다. 두 사람 교수 월급에 파트타임 일에 동암 봉사활동 하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다.”그래도 그 시절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 있던 때라고 할 수 있다.“당시 영사관, 문화원, 한인회, 아무 것도 없던 시절, 보스턴에 한인유학생은 남자만 300여명, 처자식을 한국에 두고 다들 혼자 와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우리집으로 왔다. 김치 먹고 싶어요 하고 손님이 밀어닥치면 내일 시험이 있어도, 여자가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안되는 시대였다. 우리도 고학 중이라 돈도 없고 어린애 4명이 있는 상태지만 중국타운에서 국수를 사오고 냉면을 만들고 이태리 장에서 야채를 사다가 김치를 만들었다”
▲‘파워 시니어’ 새바람
현재 전박사는 예일대 신학대와 5분 거리에 있는 햄든 소재 휘트니 센터에 살고 있다. 교수와 박사 전문직 출신 수백 명의 은퇴자가 사는 이곳에서 전박사의 인기가 뜨겁다. 전박사가 움직이면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것.
어느 날 이곳에서 이색적인 인형(Doll)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전통인형을 지닌 전박사가 ‘인형을 지닌 사람은 다 나오라’고 하자 세계 각국의 인형 40
개가 나왔고 14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이처럼 전박사는 휘트니 센터에 ‘파워 시니어‘의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은퇴후에도 할 일이 많다”며 여전히 공부와 연구, 봉사를 멈추지 않는 전박사는 물속에서 하는 운동을 하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우리 한인들이 남에게 대접 받으려면, 인정받으려면 이웃을 잘 모셔야 한다. 한인은 한인끼리
만 어울린다는 인상을 주지 말고 부모들이 먼저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유치원생 자녀가 있다면 PTA 열심히 나가고, 미국 교회도 나가고 타인종과 어울리면서 좋은 이웃, 좋은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가치있는 인생을 살기위해 노력하는 부모를 보고 자란 자식은 부모보다 더 가치있는 인생을 살 것이다’ 이것이 전혜성 박사가 전하는 자녀교육 방법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