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란(10월19일자)을 펴 보니 반가운 이름 석 자가 확 눈에 들어왔다.
‘박재삼(朴在森)’시인. 먼저 이 글을 쓸 수 있는 동기를 주신 이택제 시인께 감사드린다.
나는 40여 년 전, 20대 중후반 대학 졸업 후 신혼 때 박재삼 시인 댁에 세 들어 얼마간 살았다. 박 시인은 요즘처럼 삭막한 인터넷 세상에 더욱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분 중 한 분이시다.
고인께 누가될는지 모르겠으나 워낙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하신 순수한 분이시기에 순수한 동기로 쓰는 글이니 좀 실례가 되더라도 고인은 괘념치 않으시리라 믿고 이 글을 쓴다.
제 기억 속 그 분은 판에 박은 듯 성공하기 위한 정규교육을 받고 살아남기 위해 무한경쟁을 벌여야 하는 살벌한 이 시대와는 동떨어진 그 옛날 냉수 먹고 팔베개 삼아 오수(午睡)를 즐기는 시인이라 할까 그런 분이셨다.
사람들을 좋아하고 친구라면 껌뻑하신 분, 가까운 거리에 김수영(?) 바둑 프로 기사가 살았는데 두 분이 바둑과 약주를 즐기시고 느지막이 기원과 한국일보엔가 출근하곤 하셨다.
할머니가 계셨었고 사모님과 10세 미만의 따님 소영(?)과 아드님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밤늦게 친구들과 함께 느닷없이 귀가하셔도 사모님은 아무 불평 없이 술시중을 드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참 착한 분이시구나 여겨졌다. 어쩌면 그렇게 부창부수(夫唱婦隨)일 수 있을까. 참 존경스러웠다.
이제 돌이켜보니 박 시인은 인생에 대해 무엇인가 이미 깨달은 현인(賢人)이셨던 것 같다. 인생의 구석구석 밝은 곳, 어두운 곳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혜안의 소유자, 특히 고독과 회한 등을 표현하고자 하던 그런 시인이 아니었던가 싶다.
수 년 전 신문에서 박재삼 시인 부고(訃告)를 보았다.
모든 것이 기능과 효능 위주의 삭막하다 못해 살벌하기조차 한 현대사회에서 소박하면서 좀 어리숙하고, 천진하면서도 한 발 물러나려는 듯 여유스러움을 갖춘 박 시인 같은 분이 더욱 그리워진다. 10월 중순을 넘은 가을이라 더욱 이런 생각이 절실히 드는 가 보다. 아마도 저 세상 하늘나라에서 박재삼 시인께서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계실 것 같다.
문성길
의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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