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신학대 ‘도시 천사상’ 수상하는
▶ “교회 부흥시키듯 2세들 애국정신도 이끌어낼 것”
4월 5일 맨하탄 메리옷 호텔의 고담홀에서 ‘도시 천사상’을 수상하는 장철우 목사, 그는 ‘쓰러져 가는 교회를 부흥시키는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여러 곳의 한인교회를 거쳐 현재 뉴욕한인교회를 사목하면서 애국애족 정신을 젊은이들에게 심어주고자 애쓰고 있는 그의 삶을 소개한다
“특별히 한 일이 없는데 이처럼 큰 상 받아 부끄러울 뿐이다. 앞으로 커뮤니티를 위해 더 많은 봉사를 하겠다.” 오는 4월 5일 뉴욕신학대가 수여하는 도시천사상(Urban Angel Award)을 받는 장철우 목사(71)는 말한다. 지난 2004년부터 매년 수상되는 이 상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커뮤니티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에게 주는 상이다.그러나 장목사는 이러한 상 이름이 무색할 정도의 일을 오른 손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하고
있다. 그는 내년 후반기인 은퇴 후에 할 일까지 확실히 정해져 있다. 먼저 그가 걸어온 가시밭길 45년 목회자의 삶을 들어본다.
▲안되는 교회를 되는 교회로
“평북 운산 북진에서 태어나 해방후인 7세때 부모님 따라 월남하여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자랐다. 아버지(장창순)가 목사셨고 2남2녀 중 형님과 차남인 나는 자연스레 목사가 될 것을 꿈꾸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올린 후 하루를 시작한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애써오고 있다”그의 삶은 어려서부터 이렇게 정해져 있었다. 62년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군 생활을 거쳐 67년부터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67년부터 72년까지 서울 화양동교회에서 사목했는데 처음 25명 교인이 5년 후 300명이 되었고 교회까지 새로 지어놓고 그곳을 떠났다. 72년도에 미국에 와 시카고 에즈베리교회에서 사목하는데 처음 교인이 7,8명이었으나 15년후인 89년이 되니 300명이 되었다. 72년부터 지금까지 40여년간 교회에서 매년 3.1절 기념식과 독립선언문을 보급하고 있다.”떠나온 모국사랑을 잊지않는 장목사는 목회 활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쉬지 않아 1983년 북침례교신학교 목회학석사, 2002년 뉴욕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안되는 교회를 되는 교회로’ 만드는 장목사의 소명의식은 뉴욕에 와서도 계속 되었다.“89년 7월 1일 뉴욕감리교회에 부임하여 많은 어려움과 고생이 있었다. 92년 4월 5일 헴스테드 성전을 떠나 플레인뷰로 이사 가서 9년간 있으면서 자리 잡았다. 우리 인생의 발걸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우리의 발걸음이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어야 한다. 하나님 뜻이 아니라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교회가 자리 잡자 그는 안주하지 않고 떠났다. 5년간 뉴욕선교감리사(Mission Superintendent)로 있다가 2000년 다시 미연합감리회 뉴욕연회의 파송을 받아 그레이스 한인감리교회로 갔다. 그곳 역시 석달간 목사가 없이 교인 40~50명이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곳은 장목사가 부임한 지 6년만에 교인이 300명으로 늘며 부흥되었다.
‘위기 해결사’ 처럼 그가 맡으면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이유가 무엇일까? “쓰러져가는 교회를 흥하게 하는 은사가 있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장목사.“처음부터 다 쉽지는 않았다. 개척교회에 교인이 없을 때, 교인간 싸움이 나서 마음 상한 교인이 다른 교회로 갈 때 가장 힘이 들었다. 그분이 어딜 가더라도 신앙생활을 잘 하기를 기도했다. 하나님은 새사람을 보내주셨다.”며 “좋은 일이 있어도 기도하고 나쁜 일이 있어도 기도한다”는 그의 말에 그 비결이 있는 것같다. 그는 다시 2005년 뉴욕한인교회(Korean methodist Church & Institute) 담임을 맡았다.
▲한인 이민자 자취를 찾아
맨하탄 115가 컬럼비아 대학 맞은편 골목에 있는 뉴욕한인교회는 1921년 4월 18일 미동부 최초로 창립된 한인교회로 뉴욕한인이민사는 물론 신생 대한민국 태생의 뿌리가 된 교회이다. 재미한인사적지 1호(한미헤리테지 재단 선정, 올 작년 11월 28일) 기념동판이 교회 현관 입구 오른쪽 복도에 부착되어 있다.
“교인수도 적었고 정체되어 있었다. 당장 새벽기도부터 부흥시켰다. 현재 주일예배에 130~140명이 모이며 새벽기도에는 학생들이 많다. 저녁에는 힘들어서 공부 그만둘까 하다가 새벽기도에 나와서 다시 힘을 얻는다고 한다” 며 파안대소하는 장목사, 그가 이 교회에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다.
당시 이승만, 조병옥, 오천석, 정일형, 장덕수, 김활란, 장리욱, 윤치영, 공병우 등이 뉴욕일원에서 유학하며 교회에 출석했다. “교회 3층방에서 안익태선생이 애국가를 작곡했고 작가 강용흘선생이 소설 초당(Grass Roof)을 썼다. 지하실에 안익태 선생이 쓰던 피아노가 보관돼 있다. 교회70년사인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를 읽다가 당시 노동자로 온 교인들이 이곳 뉴욕에 묻혀있다는 것을 발견했다.”현재 퀸즈 매스페스에 있는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 대부분 묻혀있는 그들은 손에다 성냥을 그으면 불이 켜질 정도로 군살이 박힌 노동자였다. 2008년 교회 청년부와 같이 찾아가보니 묘지 한쪽 끝자락에 무덤이 있었다.
“1900년대 하와이 노동자로 온 독신자들이 계약기간이 끝나고 뉴욕으로 많이 왔다. 그곳에 ‘대한인 염세우’, ‘대한인 황기환’ 묘비가 단 두 기 있었다. 초라한 비석이지만 죽어서라도 대한인으로 그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고 콧잔등이 시큰했다.”가지고 간 교인 명부를 대조해 보니 80여년전 분명히 그분들 이름이 적혀있었다. 묘지 사무실에 비치된 명부에서 당시 한인이름이 50여명 기록된 것도 발견했다. “은퇴하면 그곳의 모든 한인 이름을 다 찾아내어 공동비석을 세우는 것이 장차 내 일이다.” 장목사는 그래야 우리 이민사가 정리된다고 한다.
“3년 전부터 청년부 교인들과 추석성묘를 가고 있다.이것이 바로 은연중 배우는 애국이고 애족이 아니겠는가.”장목사를 평생 내조해 온 장성자 사모와는 교회에서 목사와 성가대원으로 만났다. “목사 사모는 힘들어.” 한마디로 결론 내리는 그는 “기계체조 선수로 유니버시아드 대회 동메달을 땄을 정도로 건강하지만 혈압약을 먹는다”고 한다.슬하의 2남 1녀 모두 출가했고 큰아들 데이빗 장은 성경구절을 영어와 한글 이중으로 캔버스에 쓰는 유명 화가, 큰딸도 파인아트를 전공했고 둘째아들은 맨하탄에서 부동산업을 한다.
▲55년만에 지킨 약속
장철우 목사가 교회 부흥과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지난 2년간 흥사단 미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활동한 것은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다.“6.25 전쟁당시 생계비가 힘든 상황에서 흥사단 년회비를 몇 년동안 못내었던 아버지는 ‘나중에 네가 빚을 갚아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55년만에 그 약속을 지켰다.이처럼 작은 약속 하나를 반평생 후 기어코 지킨 신의, 철저한 정신력이 오늘날까지 장철우 목사의 모든 사역에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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