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시골에 계신 친척집에 놀러가면, 같은 성을 가진 집성촌에는 집집마다 걸려있는 액자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지도에 무궁화를 수놓은 액자였다. 그리고 방의 한쪽 구석에는 Home Sweet Home이라고 십자수로 써 넣었던 횟대도 걸려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후에는 모두 사라졌으나, 지금도 그 액자가 말해주던 의미를 되돌아 본다. 그것은 아마도 나라를 잃었던 슬픔과 애국심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해방이 된 후, 8월이 되면 가장 많이 불리워지는 노래가 아마도 애국가일 것이다. 애국가를 처음에는 여러 곡조로 불렀는데, 우리가 어렸을 때에 가장 많이 들었던 곡조는 ‘올드랭 사인’이었다. 애절한 곡조와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의 마음이 서로 합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작곡가 안익태가 1930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왔다, 그 때에 우리 동포들이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랭 사인’의 멜로디로 부르는 애국가를 듣고 1936년에 ‘한국 환상곡’을 작곡하면서 지금의 애국가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특히 태극기가 있는 곳에서 애국가를 들으면 깊은 감동과 함께 그것을 듣는 우리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국내에서든지 해외에서 공식 행사를 할 때, 심지어는 음악회를 시작하기 전에도 우리는 모두 서서 애국가를 부른다. 국제경기를 한다든지,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따는 경우에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뭉클한 가슴으로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사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지를 못한다. 애국가의 곡을 지은 안익태는 알고 있으나, 가사를 지은 좌옹 윤치호의 ‘국민가’가 지금의 애국가 가사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민가를 애국가로 지정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 가사를 사랑하였다. 안익태가 작곡을 하기 전에는 여러가지 다른 곡으로 불리웠으나, 가사는 언제나 지금의 애국가였던 것이다.
지금은 어느 곳, 어느 나라에 가든지 북한을 빼놓고는 어떤 장소에서나 마음대로 애국가를 부른다. 애국가와 태극기는 우리의 자존심과 긍지, 그리고 해외에 살고 있는 후세들에게도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촉매가 된다. 특히 8월에 부르는 애국가는 나이가 많으신 분들에게는 특별한 감회를 일으킬 것이다. 애국가와 태극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던 기억이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관현악으로 연주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애국가는 우리민족의 기상을 엿볼 수가 있으며, 1907년에 쓴 윤치호의 ‘국민가’는 그 오랜 역사와 함께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민족의 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 통역관이기도 했던 윤치호는 시대의 흐름을 일찍 깨우쳤던 선각자이기도 했다. 우리가 너도 나도 영어공부를 하는 이 시대를 살면서 시대를 앞서 갔던 애국가의 작사자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8월의 태양이 대지 위에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을 때, 불현듯 우리의 마음도 불꽃 처럼 타 오른다. 칼리포니아의 맑은 하늘과 빛나는 햇살, 바닷가에서 일어난 바람은 이 땅의 절벽을 떠나 태평양의 저쪽 끝자락을 향하여 달려 나간다. 8월의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의 소리. 깃발이 나부끼는 소리. 그 때 퍼져나가던 8월의 함성. 애국가와 함께 들려오는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 2010년의 여름이 무르익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