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 한동안 한국 대학생들의 필독도서 중의 하나였던 E. H. 카가 쓴 ‘역사는 무엇인가’(1961)라는 책에 나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책과 이름이 유명한 것에 비해 그가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떤 주장을 폈는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국 중상류 층 출신으로 캠브리지에서 수학한 그는 1939년에 쓴 ‘20년간의 위기’로 처음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는 여기서 히틀러의 등장은 제1차 대전 후 가혹한 전후 처리의 귀결이라며 나치 유화 정책을 주장한다. 곧 이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망신을 당한 후에는 대표적인 친소 학자로 변신, 소련의 동구 점령을 옹호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가는 역사를 쓸 때 과거의 수많은 사실 가운데 필연적으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을 골라내야 하는데 그 선정 과정에서 개개인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기 때문에 애초부터 객관적인 역사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가는 헤로도투스가 말한 것처럼 “과거의 진실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기억하고 과거를 상상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객관적인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쓰는 사람의 입맛에 맞게 재단되는 창작품이란 주장은 카만의 생각은 아니다. 소위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적 상대주의 등 수정주의 사가들은 모두 이를 신봉한다. 마르크스주의 등 좌파 사학자도 마찬가지다. 종전의 역사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한 것에 불과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집권을 위한 주장이라면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사학계도 그 입김을 강하게 받았다. 당시 한국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 따르면 미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한 점령군이며 대한민국의 역사는 친일파와 기회주의가 득세한 불의의 역사다. 이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386 운동권의 역사관임은 물론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일제 때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인 김일성 집단이 세운 북한이야말로 정통성 있는 나라며 한국은 아직도 사대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반식민지 국가가 된다.
이런 주장의 문제는 자기 입맛에 맞는 사실은 침소봉대 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불편한 진실은 카펫 밑으로 쓸어 넣는다는 점이다.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을 것이고 그렇게 됐더라면 지금 한국민들은 김일성 부자 치하에서 북한 주민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 자명한데도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김일성이 1930년대 후반 항일 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덕으로 그 자손까지 60년째 왕 노릇하며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 그 동안 그가 일으킨 6.25 전쟁으로 수백만이 죽고 또 다시 경제 파탄으로 수백만이 아사했는데도 이에 대한 비판은 좌파 사학자들로부터는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와 재벌들의 부정부패만이 보일 뿐이다.
시장 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소장파 학자들로 구성된 뉴라이트 계열에서 펴낸 대안 교과서가 최근 한국에서 논란을 빚고 있다. 이들은 이 책에서 일제시대에 한민족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나 근대 국가의 터전을 닦았고 박정희는 독재를 했으나 경제 발전을 이룩했으며 정주영과 이병철은 정경유착의 폐해를 낳았지만 한국의 도약에 기여했다고 적고 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주장들이다. 이런 당연한 주장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동안 한국 사회가 얼마나 한쪽으로 기울었었나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한국은 제2차 대전 후 독립한 100여개 국가 중 거의 유일하게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나라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해방 후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신봉하는 미국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왔고 그 이전 이를 실현하려던 선각자들이 있었으며 그 이념을 담은 헌법을 토대로 대한민국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건국 60주년을 맞는 올해 대한민국 탄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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