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 김만중의 입석상 제막식이 지난달 15일 남해 용문사에서 열렸다.
만삭의 몸으로 피난 중에 배에서 태어난 유복자 만중은 후에 공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지만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에 빠져 정사를 그르치는 것을 보고 바른말을 참지 못한 그의 강직성 때문에 유배를 당한다.
“어미를 받들고자 나라를 위해 바른말을 못한다면 오히려 이 어미에 대한 불효이니라”라고 어머니는 그렇게 위로했다.
유배지에서 사씨남정기를 지어 다시 간했지만 어머니의 임종조차 보지 못한 채 남해 노도에서 파란과 통한의 생애 56세를 마감한다.
강원도 금성, 평안도 선천을 거쳐 세 번째 유배생활을 할 때는 가시 울타리에 가두어둔다는 ‘가극안치’(加棘安置)라는 참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그 어머니는 병자호란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편 김익겸이 분신 자결하여 일찍이 청상과부가 되었다.
열일곱 살에 맏아들 만기를 낳고 스물한 살에 만중을 낳았다. 미망인으로 평생 소복을 하고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며 풍류소리를 듣지 않았다.
윤씨 부인은 학문에 조예가 깊고 책을 빌려와 손수 베껴서 자식을 엄하게 가르쳤다. 아비 없이 버릇없는 자식으로 자랄까 훈계했다. 베를 짜고 수를 놓으며 어려운 생계를 유지하며 두 아들을 과거에 급제시키고 당대 최고의 학자로 키워낸 현철한 조선의 맹모였다.
만중은 옛 글을 읽어드리고 춤을 추며 어머니를 늘 기쁘게 해주었다.
자식 뒷바라지로 평생을 힘겹게 보낸 어머니, 자나깨나 자신의 안부만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유배지에서 몽자 소설의 효시인 구운몽을 지었다. 양소유가 팔 선녀를 거느리고 세상 부귀영화를 잠시 누렸지만 인생은 한바탕 부질없는 꿈에 지나지 않으니 결국 불법에 귀의한다는 내용이다.
어머니 부음을 듣고 불초 고애자(孤哀子) 만중이 읍혈하고 삼가 기록했다는 ‘정경부인 윤씨행장’에는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서려 있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립다는 말 쓰자 하니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이 이미 흥건하다.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다시 던져 버렸는고”
윤씨 생신 아침에 지었다는 이 시가 가슴을 파고든다.
고영주
국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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