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면 더위와 모기 등쌀에 뒷마당에 만들어 놓은 채소밭에 나가기가 두려워 다음 해에는 절대로 아무것도 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새해가 되어 이월이 되면 지난해에 받아둔 씨앗을 꺼내 다시 모종을 만든다.
싹이 터서 나오기를 마음 졸이며 기다리다가 흙 속에서 희끗하게 올라오는 게 보일 때 느끼는 환희로 가슴이 뛰고, 또 매해 보면서도 매번 경이롭다. 생명의 소리가 눈을 통해 온몸으로 전달되어 짜릿하다. 올해도 예외 없이 모종을 만들었다.
호박, 오이 모종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빨리 자란다. 지난겨울은 무척 추워서 봄이 늦게 올 줄 알았더니 3월 말에 여름 날씨처럼 섭씨 32도에 가까웠다. 모종 컵에 뿌리가 뭉쳐있는 것보다 땅에 심으면 더 빨리 자라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과 욕심으로 세 개의 호박 모종을 서둘러 땅에 심었다.
계절은 못 속이는지 심은 지 겨우 이틀 지났는데 밤에 기온이 갑자기 영하로 떨어졌다. 밤 기온이 차다는 예보를 들었지만 이미 심은 것을 다시 파내서 집안으로 갖고 들어와야 할지 어떨지 망설이다가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빈 화분들로 덮어서 추위를 막아보자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덮어놓은 화분을 들어보니 물이 올랐던 잎과 줄기가 얼었다가 녹은 게 확연히 보였다. 제발 살아나라고 빌었지만 소생하지 못했다.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 모종이라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다시 호박 모종을 만들기 시작했다.
4월이 더위로 시작하길래 이번엔 오이 모종 세 개를 밭에 심었다. 또다시 이틀쯤 후에 다시 영하의 기온으로 떨어진다는 예보를 접했다. 지구 온난화로 기후가 상승했다고만 생각했는데 기후 변화에 따라 기존의 날씨 규칙이 깨지면서 오히려 냉온탕을 오가는 것처럼 극단적인 날씨의 반복이 심하다고 한다. 이번엔 빈 화분만이 아니라 온실처럼 얇은 보온 비닐도 덮어주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나가서 열어보니 얼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추위 속에 내보낸 나를 힐책하듯 하루하루 지날수록 잎과 줄기가 마르기 시작했다. 남편도 덩달아 내 속을 찌른다.
“이 지역에서 4월 중순쯤 돼야 사람들이 토마토 등을 심는 데는 다 통계적인 이유가 있는 거야. 어째 너무 서두르는 것 같더라.” 그 순간 한국의 4월 5일 식목일이 떠올랐다. 그 날짜도 통계에 의한 건지 궁금한 마음에 구글 검색을 해 본다.
AI가 알려주기를 4월 5일은 이십사절기 중의 하나인 청명(淸明) 무렵으로 날씨가 맑고 평균 기온이 섭씨 6.5도로 기온도 따뜻하고 봄비도 많이 내려 묘목이 뿌리를 내리고 생장하기 가장 좋은 조건이란다. 내가 몰랐을 뿐이지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농수산부에 근무하던 아버지는 식목 행사에 나를 데리고 가곤 했다. 모든 공무원이 식목에 참여 했는지 아니면 아버지 부서만 그런 행사에 동원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겐 식목일이 아버지와의 소풍날이었다.
어느 해인가는 아버지가 식목하는 동안 난 여기저기 구경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나만 덜렁 남겨진 듯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무서워서 울고 있는데 누군가가 “빨리 와, 같이 단체 사진 찍어야지.”하는 게 아닌가. 모두 한곳에 모여있어서 주변이 조용한 줄을 모르고 울었던 게 부끄러웠지만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좋아서 쏜살같이 달려가 단체의 끝자락에 쪼그리고 앉은 채 사진에 찍혔다.
남편의 말을 확인할 겸 내가 사는 곳의 파종 시기도 찾아봤다. 땅이 넓은 미국은 농무부(USDA)에 의한 재배 구역 즉 식물 내한성 구역을 연평균 최저 겨울 기온에 따라 13개 지역으로 나눴다. 숫자가 낮을수록(1~4) 추운 지역이고 숫자가 높을수록(8~11 이상) 따뜻한 지역이다.
내가 사는 메릴랜드는 6~7 지역으로 내한성 작물(상추, 케일 등)은 3월에 봄 파종을 시작하고, 온난성 작물(토마토, 고추, 오이 등)은 일반적으로 4월 말에서 5월 중순 사이에 이식해야 한다.
몇 년 전에 심은 상추가 해마다 저절로 나오는데 사월 중순인 지금 벌써 잎을 따서 먹을 정도로 자란 이유가 내한성 작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잎이 나고 뿌리가 자라면 적당히 따뜻한 날을 골라 땅에 심고, 열매가 나면 따서 먹는 것으로 알았던 나의 ‘농부’ 개념에 큰 균열이 생겼다.
아는 게 힘일 뿐만 아니라 뭐든지 제대로 알고 시작해야 몸과 마음이 덜 고달프다는 지론이 다시금 고개를 든다.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때가 있다. 서두른다고 모든 일이 빨리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줄도 알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인내도 길러야 한다고 때를 아는 씨앗이 내게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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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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