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뢸라네스(Trøllanes)에서 칼루르(Kallur) 등대까지, 세상 끝을 걷는 길
▶ 곽노은 여행 칼럼니스트
칼소이(Kalsoy)에 들어선 순간, 섬이 바람의 통로처럼 느껴진다. 페리에 차를 싣고 닿는 즉시, 다른 세계가 열린 것이다. 섬 북단 트뢸라네스에서 칼루르 등대로 이어지는 길. 사람들은 이곳을 ‘세상 끝의 길’이라 부른다. 첫발을 내디디자 좌우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 열리고, 해풍이 온몸을 스쳤다. 그 속에서도 양들은 태연히 풀을 뜯고 있었다.
능선의 오솔길은 가는 선처럼 이어진다. 양옆으로 깊은 푸름이 끝없이 펼쳐지고, 한 걸음마다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번갈아 스며든다. 안개 속 작은 등대와 빨간·파란 우비가 한 장면을 완성한다. 칼루르 끝자락에는 ‘In memory of James Bond’라는 추모 표식이 있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허구의 이름이지만, 이 풍경 속에서는 현실처럼 각인된다. 여행은 현실과 상상, 역사와 전설의 경계를 걷는 일이다.
바람과 전설이 머무는 마을, 미클라달루르(Mikladalur)
칼소이의 진짜 얼굴은 영화보다 오래된 이야기 속에 있다. 남쪽의 미클라달루르는 바다와 사람이 맞닿는 자리다. 붉은 지붕 교회 옆 작은 묘지는 고요하고, 잔디 지붕 집들이 언덕에 포개지듯 앉아 있다. 갈매기 울음이 낮게 흐르고, 바다에는 소금기와 이끼 냄새가 섞여 난다.
첫 번째 전설은 코파코난(Kopakonan), 물개 가죽을 벗고 인간으로 사는 바다의 여인 이야기다. 가죽을 빼앗겨 억지로 아내가 되지만 끝내 되찾아 바다로 돌아간다. 해안 바위 위 청동상은 파도와 함께 숨 쉬는 듯하고, 그 눈은 지금도 마을을 응시한다. 두 번째 전설은 ‘돌을 든 여인’이다. 혼인 밖에서 아이를 가져 손가락질을 받던 여인이 광장의 거대한 돌을 들어 올리자 사람들은 잠잠해졌다. 편견을 꺾는 인간의 존엄이다. 그 힘은 벽화와 실제 돌 곁에 여전히 남았다.
그리고 짧은 만남 하나. 트뢸라네스 입구에서 입장 안내를 맡고 있는 태국 출신의 여성이 짧은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페로제도에는 대략 100명의 태국인과 230명의 필리핀인이 이주해 정착해 살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 모든 그리움을 대신하진 못한다는 사실이 그 미소 뒤에 조용히 남았다.
세상 끝에서 열린 또 하나의 문
칼루르 등대 앞에 서면, 끝인 줄 알았던 곳에서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 너울은 절벽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바람은 지칠 줄 모르고 분다. 그런데 마음은 오히려 고요하다. 코파코난이 바다로 돌아가듯, ‘돌을 든 여인’이 편견을 이기듯, 그 미소가 그리움을 품듯, 나 또한 길 위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들어 올린다. 칼소이는 말한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절경만이 아니다. 바람 속에 새겨진 숨결과 전설, 꺾이지 않고 살아온 삶의 흔적에 있다. 양들이 풀을 뜯는 소리마저 낮은 찬송처럼 오래 울리고 있었다.
배에 올라 섬을 뒤돌아보면, 능선의 바람은 여전하고 바다는 쉼 없이 숨을 쉰다. 그러나 그 바람은 더 이상 차갑지 않다. 삶을 지탱해 온 호흡, 세대를 잇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여행의 끝은 종착이 아니라 다시 걷기로 한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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