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점심 즈음 서울 성북동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사람들이 유독 작은 식당 앞에 줄지어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하얀 커튼으로 내부를 가린 가게 앞에는 햇빛에 바래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 글씨로 적힌 '카레'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식당에서 파는 메뉴의 정체이자 식당 이름이기도 하다.
누구나 한 번쯤 자기만의 작은 가게를 꿈꾸지만 막상 현실이 되면 녹록지만은 않다. 작아서 좋은 점들도 있지만 작아서 힘든 점도 많기에 희망이 가득 차 시작한 작은 가게들은 대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라진다. 누군가의 로망을 현실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성북동 '카레'는 올해로 7년째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 향신료 직접 배합해 만드는 카레
오전 10시, 김민지(35) 대표는 양파를 손질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커다란 냄비에서 볶아지는 양파의 단내와 향신료가 기름에 스며드는 냄새가 좁은 공간을 금방 채운다. 메뉴는 단 두 가지다. 늘 맛볼 수 있는 시금치 카레와 계절에 따라 매번 바뀌는 카레다. 김 대표가 만드는 카레는 일명 ‘향신료 카레'다. 만들어진 시판 카레 제품을 쓰지 않고 향신료를 직접 배합해 만든다.
“저희는 루를 쓰지 않아요. 루를 쓰면 향신료가 가진 고유의 맛이 조금 평범해진달까요." 묵직하고 전분기 많은 소스 대신에 묽게 흐르지만 향신료의 향이 층층이 쌓여있는 스타일이다. 우리에게는 아직은 낯설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일컫는 ‘스파이스 카레'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안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는 리뷰처럼 마지막 한 입까지 질리지 않게 하는, 개성 있는 카레의 풍미는 몇 시간이고 줄을 서게 하는 매력이 있다.
김 대표는 카레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대학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며 미술사, 미학, 예술 이론을 두루 배웠지만 직업으로 삼기에는 확신이 없었다. 졸업 후 백수 시절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한 비영리단체(NGO)가 만든 식당에서 봉사활동을 했는데 카레와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종종 혼자 카레를 만들어 먹긴 했지만 카레를 대량으로 만들어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만 해도 카레집을 할 거란 생각을 안 해봤어요. 집에서 3, 4인분 만드는 일과 40~50인분을 만드는 건 차원이 다른 고된 일이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커피 회사에 취직했다가 1년 만에 그만둔 그는 ‘놀면 뭐 하니'란 심정으로 단골 샌드위치집에서 카레 팝업을 열었다. 평소 집에서 만든 카레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곤 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기에 겁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카레는 매번 완판됐다. 자신감을 얻어 ‘카레집이나 해볼까' 생각만 하던 중 김 대표의 어머니가 덜컥 가게를 계약했고 2018년 3월 얼떨결에 카레집을 열게 됐다. 성북동 카레는 메뉴 개발과 접객을 하는 김 대표와 식당 일을 오래 하신 어머니가 함께 운영하는 2인 식당이다.
■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카레"초창기 카레 스타일은 지금과 달랐다. “처음엔 익숙한 일본식 카레 루를 섞어서 블렌딩해서 만들었어요. 막상 가게를 열고 보니까 일본식 카레집이 이미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럼 나는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다 향신료만 써서 하는 카레를 해보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죠."
김 대표는 틈틈이 일본 도쿄와 오사카의 스파이스 카레 가게를 찾아다니며 맛을 보고, 서점에서 카레 서적을 뒤졌다. “처음엔 감이 전혀 없었죠. 어느 정도 양에 향신료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5인분 계량을 10배를 한다고 50인분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라면 수프처럼 정배수가 통하지 않는 세계예요."
수많은 실패와 조합 끝에 비로소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메뉴 개발은 탄력을 받았다. 3년 차까지는 신메뉴 압박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한 가지씩 만들어냈다면, 4, 5년 차에 접어들면서는 한 해에 10여 가지 새로운 카레를 만들 정도로 속도가 붙었다.
김 대표는 하루에 100인분 양의 카레를 준비한다. 일부는 그날 바로 만들어 내고 어떤 카레는 전날 미리 끓여 하루 이상 숙성시키기도 한다. “방금 끓인 카레는 향신료의 선이 뚜렷한 편이에요. 반면에 숙성한 카레는 선명한 맛이 조금 누그러지는 대신에 부드러워지고 맛의 결이 더 촘촘해지죠."
카레라는 단출한 메뉴를 만들지만 김 대표가 추구하는 가치는 개성이다. “결국 이건 대기업이 하는 제품이 아니라 작은 개인 가게가 하는 카레잖아요. 일본의 스파이스 카레 가게들처럼 딱 먹어보면 ‘아 이건 어느 가게 거다'라고 느껴지는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있어야 손님이 계속 와주시지 않을까 하는 거죠."
그가 만들고 싶은 카레는 궁극적으로 날마다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카레다. “계절감을 많이 반영하려고 해요. 메인 메뉴 바꿀 때 제철 재료를 최대한 쓰려하고요. 그래야 제가 해도 재미있고, 손님들도 찾아오실 이유가 생기니까요."
■ 확장 제의도 거절... 작은 가게의 매력성북동 카레는 작은 가게를 꿈꾸는 이들에게 모범적인 사례다.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을까. “하지 마세요."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농담만은 아니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작은 가게는 1부터 10까지 본인이 다 책임져야 하는 구조예요. 여기에 요즘엔 SNS 관리도 철저하게 해야 하고요."
김 대표의 처음 목표는 ‘2년만 버티자'였다. 2년을 넘긴 후에는 5년, 이제는 10년이 목표다. 그는 막연한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소박한 처음의 목표, 작은 가게에서 매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데 만족하기를 택했다. 주변에서 확장을 권하면 번번이 거절했다. “확장해서 직원들이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하면 열에 아홉은 사장이 안 나오기 시작해요. 그러면 음식 퀄리티가 떨어지는 걸 느껴요. 저는 그게 싫거든요."
손님 절반 이상은 단골이다. 한 달에 10번 이상 오는 손님도, 격주로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처음엔 고수 안 드시던 분들이 이제는 3분의 1 정도만 빼달라고 해요. 낫토 토핑도 처음엔 주문이 없다가 지금은 꽤 나가죠. 손님들도 저와 함께 입맛이 성장하는구나 싶어요. 한 사람의 5년, 10년 안에 이 가게가 조금이라도 끼어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감사한 일 아닐까요."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볼 때마다 늘 보람을 느낀다는 김 대표. 계획을 멀리 세우지 않는 대신 오늘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작은 가게를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10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성북동 카레집의 하루는 향신료 내음과 함께 오늘도 시작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